본문 바로가기
교양인/문제적 인간 시리즈

[스탈린] 책 소개

by 교양인 2010. 11. 26.

한글 파일로 보실 수도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내려받으세요.

스탈린(개정판) 보도자료.hwp



"《스탈린》은 결함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재능이 풍부했던 스탈린이라는 정치가의

복합적인 내면 세계를 되살려냈다.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가 주조한 스탈린의 고전적인 이미지에 도전해 그 이미지를 깨뜨린다." - <가디언the Guardian>





권력의 생리를 동물적 감각으로 꿰뚫어본 정치적 인간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그리고 부하린까지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권력의 정점에 선 어둠의 전략가!


젊은 스탈린은 시인이었다. 아름다운 언어를 낭만적으로 직조한 그의 시는 시대의 열망을 노래했다. 스탈린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독서광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의지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했다. 스탈린은 소탈한 혁명가였다. 겸손함과 친근함으로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허물없는 동지였다. 스탈린은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권력 경쟁의 모든 국면을 통과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꿋꿋하게 기다리고 견디는 집념의 인간이었다.


스탈린은 목표물을 정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냉혹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스탈린은 복수의 화신이었다. 자신을 모욕한 자는 절대로 잊지 않고 10년, 20년이 지난 후에도 반드시 되갚아주었다.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전제 권력자였다. 정치 공간의 주인이 된 뒤 30년 동안 한 치의 흔들림도 주저함도 없이 자기 의지를 관철했다.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공포의 조직자였다.


삶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권력 세계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간 남자.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혁명가들을 모두 제압하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스탈린은 히틀러처럼 뛰어난 연설가도 아니었고, 레닌처럼 탁월한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 예상하지 못한 비밀에 싸인 인물이었다.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는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완강한 고정관념에 갇혔던 ‘강철 권력자’를

인간 스탈린으로 되살려낸 엄정한 전기!

20세기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거장 로버트 서비스의 대작


러시아사 연구의 권위자 로버트 서비스가 30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스탈린》은 ‘공포의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삶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압도적인 전기이다.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다가 최근에야 서방 학자들에게 문을 연 모스크바 문서보관소의 자료들과 저자가 직접 만나서 들은 증언, 러시아와 그루지야, 아브하즈 전역에서 수집한 사적인 자료들에 기대어, 로버트 서비스는 이 소련 지도자를 무자비한 관료로만 보는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견해를 뒤집는다.


스탈린은 1928년에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 50세였다. 저자는 이 ‘강철 인간’을 낳는 데 영향을 준 모든 것들을 유례없이 세밀하게 보여준다. 폭력적인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어린 시절, 신학교에 들어가서 보낸 청소년 시절, 헌신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투옥과 유형을 반복하던 혁명가 시절, 10월혁명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이미 볼셰비키 지도자가 되었던 열정적인 시절……. 또 저자는 혁명 후 내전 때 한 역할과 행동이 어떻게 공포 정치 시대의 스탈린을 예고해주는지도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는 이념을 추구했던 한 인간, 레닌을 비롯한 어떤 동료 지도자 못지않게 현실적인 분석력과 뜨거운 열정을 지녔던 스탈린을 보여준다.


스탈린에 관한 증거는 스탈린 자신이 목격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기록된 문서를 은폐하거나 폐기한 탓에 불투명한 안개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30년간 이 주제를 파고든 로버트 서비스는 철저한 조사와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넘어선 균형 잡힌 시각,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 특별하고 복잡한 사람을 총체적 평전으로 되살려내었다.


《스탈린―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은 2007년 2월에 출간한 《스탈린, 강철 권력》의 제목, 표지, 본문 편집을 완전히 바꾸고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은 전면 개정판이다.



트로츠키와 흐루쇼프가 만들어낸 스탈린은 없다!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그는 베일에 싸여 있었고, 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자료들 가운데 많은 것이, 그중에서도 특히 트로츠키와 흐루쇼프의 회상록은 정치적인 적개심에 물들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스탈린을 ‘혁명을 놓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1917년 전이나 1917년에 레닌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가 볼셰비즘의 뒷방에 있던 뚱한 관료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껏해야 레닌의 문제 해결사,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크렘린의 지시를 받고 파견되는 사람일 뿐이었다. 이 책에서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이 역사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에서는 스탈린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제시해준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가 한 일뿐 아니라 그가 그 일을 왜 했는지,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도 살폈다. 지도자, 관료, 이론가, 작가, 동지, 남편, 아버지였던 그를 동시에 살폈다. 그의 사회적 배경과 학교 교육, 민족성, 일하는 방식, 여가를 보내는 방식도 분석했다. 또 스탈린을 심리학적 유형의 하나로 고려할 필요도 있었다. 그가 벌인 정치 공작이나 정치적 수완 같은 묵직한 주제도 다루었지만 그의 일상 생활 습관도 들여다보았다.


스탈린은 살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지식인, 행정가, 당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작가이자 편집자이며 정치가였다. 사생활에서는 심술궂은 남편이자, 아버지였지만, 나름대로 가족에게 헌신하기도 했다. 그는 재능이 많았고, 자신의 지성을 이용해 언제든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섬뜩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매료시키고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과소평가했다. 그의 복잡성을 살피고 그의 삶과 그의 시대를 이해하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일 것이다.

- ‘여는 글․스탈린은 누구인가’(24쪽~31쪽에서)



스탈린은 누구인가?


스탈린의 아버지는 삶의 낙오자이자 비참한 주정뱅이였다.

1878년 12월 6일 스탈린은 그루지야의 소도시 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였다.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은 구두장이였다. 성질이 불 같았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구둣방이 실패하여 문을 닫자, 술을 퍼마시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비참한 가장이 되었다.


스탈린은 딸 스베틀라나에게 한번은 어머니가 또 두들겨 맞기에 자기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했다. 칼은 빗나갔고, 잔뜩 화가 난 베사리온이 이오시프에게 달려들었으나 동작이 느려 그를 잡지 못했다. 이오시프는 그 길로 달아나 아버지의 화가 제풀에 풀릴 때까지 이웃에 숨어 있었다. (1부 ‘혁명가’․44쪽)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이오시프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열 살 때 종교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으나,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에게 호소해 아들을 구두공장에서 되찾아 왔다. 어머니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스탈린은 사제 수업을 받은 신학생이었으며, 빼어난 시인이었다.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16살이던 1894년 그루지야 수도의 티플리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직자 교육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스탈린은 이미 1학년 때 신문에 시를 발표해 그루지야 문인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가 다룬 주제는 자연과 대지, 애국심이었다.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 꽃이여, 아 나의 그루지아여! /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 친구들이여 노력해 / 빛내라 조국을! - 스탈린의 시 <아침> (1부 ‘혁명가’․72쪽)


그루지야 문학 세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시인 스탈린은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레닌 등의 책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신념과 시에 대한 열정을 버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학교 졸업을 앞둔 1899년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뒤로 하고 반란자의 세계로 들어섰다.


스탈린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독서광이었고, 노력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평생 맹렬하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역사적인 인물, 특히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에 관한 책들은 수없이 읽었으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주석을 달아 가며 꼼꼼히 읽었다. 감옥에서도 유형지에서도 심지어 내전 때 전장에서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내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레닌의《국가와 혁명》개정판을 가지고 다녔다. 이 책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그 내용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책 가장자리에 메모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당이 프롤레타리아의 의지에 반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프롤레타리아는 전위 없이는, 유일한 (당인) 당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를 수 없다.” (2부 ‘당 지도자’․276~277쪽)


그의 지적 관심은 문학, 역사, 경제, 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사 전략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 얼마 안 가 군사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 주로 사회주의 이념을 다룬 저작을 써 온 스탈린이 1950년에 러시아 민족의 언어를 다룬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경쟁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스탈린은 글을 유려하고 논리적이고 사려 깊게 쓰는 지식인이었다.


스탈린은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혁명가였다.

1899년 혁명 운동에 뛰어든 스탈린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스스로 두각을 나타냈다. 비밀 지하 활동과 비합법적인 선전,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조하는 스탈린은 영락없는 미래의 볼셰비키였다(볼셰비키 파는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 성립된다). 1902년 4월 처음 체포된 이후로 그는 몇 번의 체포와 유형, 탈출을 반복했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이미 스탈린은 그루지야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조직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주가시빌리는 이미 선택을 했다. 그에게는 볼셰비키 전략이 가장 훌륭해 보였다. 그의 동료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이는 주가시빌리의 논쟁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거의 유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단도직입적이었고 공격적이었다. …… 주가시빌리는 그루지야의 멘셰비키들과 빈번하게 논쟁을 벌였다. 노동자들의 모임에서도 이야기했다. <프롤레타리안스 브르졸라>에도 아주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민족 간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정력적으로 볼셰비키 정책을 추진하며, 봉기를 통해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임시 혁명 정부를 세우자고 했다. (1부 ‘혁명가’․105~106쪽)


1912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스탈린은 레닌의 요청으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프라우다>를 창간하고 편집인을 맡았다. 마침내 볼셰비키 핵심 지도부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스탈린’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철(stal)’을 뜻하는 러시아 이름이었다. 수도에서 정력적으로 볼셰비키 활동을 이끌던 그는 1913년 2월 마지막으로 체포를 당하여 시베리아 북동쪽 끝 투루한스크로 유형을 떠났다. 그는 제정이 무너진 1917년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스탈린은 소탈하고 겸손한 혁명가였다. 그는 지적으로 탁월한 다른 혁명가들처럼 거만하지 않은 동지였으며, 순박한 태도로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친근한 동료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코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는 신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어떤 분위기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냉정하고 과묵한 그는 자신에 대한 경쟁자의 신랄한 비판 앞에서 분노를 감추고 인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자제력은 동료들 사이에서 전설적이었다.


그는 짧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었고, 입을 벌리고 크게 소리내어 웃는 법이 없었다. 미소 짓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 미소도 달라졌지만, 그게 소리내어 웃는 웃음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완벽하게 냉정하고 침착했다. 쿠타이시 감옥에서 반 년 넘게 함께 지냈지만, 나는 한 번도 그가 자제력을 잃고 동요하거나 화를 내고 욕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는 아주 평온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은 ‘얼음 같은 차가운 성격’이라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그런 성격에 딱 어울렸다. - 1902년 무렵 쿠타이시 감옥에서 같이 지낸 그리골 우라타제의 회상록 (1부 ‘혁명가’․96쪽)


지도자 스탈린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심리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린 대량 학살자였다. 또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고하고 글을 썼으며, 이전 세기의 무자비한 러시아 통치자들처럼 행동했다. 그는 당의 우두머리였고, 행정가였으며, 편집자였고, 신문에 글을 기고했다. 또한 그는 가장이자 친절한 별장 주인이었고, 게걸스런 독자였으며, 지적인 독학자였다. 상황에 따라 그는 이 모든 면을 한꺼번에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면은 드러내고 어떤 면은 감추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나누고 또 나눌 수 있었다. 스탈린의 다양한 모습에 동료들은 감동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무쌍한 모습이야말로 그가 동료들을 계속 지배할 수 있었던 비밀 가운데 하나였다. (4부 ‘국제 정치의 거인’․579쪽)


스탈린을 서기장 자리에 올린 사람은 레닌이었다.

스탈린은 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레닌을 숭배하였다. 1905년 핀란드에서 레닌을 만난 이후 스탈린은 레닌의 충복으로서 믿음직스럽게 임무를 수행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로 강도질을 하기도 했다. 두 그룹의 강도 집단을 이끈 스탈린은 사기, 강탈, 무장 강도를 통해 계속 당의 자금을 모았으며, 1907년 6월에는 지폐 운반 마차를 털어 25만 루블을 강탈해 레닌에게 보냈다.

레닌은 민족 문제 측면에서 스탈린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레닌은 스탈린이 1913년에 발표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좋아했는데, 비러시아인에게 자율적인 행정권을 주어야 한다는 해결책이 자신의 의견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민족 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예리한 분석은 레닌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은 민족이라는 것이 확정되지 않은 일시적인 현상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함께 올 수도 있지만 상황이 변하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더 강한 민족에게 흡수되는 민족 집단도 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민족 집단도 있을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 점에서 확고했다. “민족성이라는 것이 영원히 불변하는 실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렇다면 민족도 다른 역사적 현상과 마찬가지고 나름의 역사가 있어 시작과 끝이 있으리라는 것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부 ‘혁명가’․163쪽)


혁명 국가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주의가 필요 없다며 트로츠키가 촉발시킨 노동조합 논쟁으로 분파 간 논쟁이 격화되자 위기를 느낀 레닌은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좌익 반대파 등 수많은 분파로 당이 갈라지면서 신생 소비에트 국가가 안으로 붕괴할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지방에서 레닌주의 지지자들을 조직한 스탈린의 도움으로 레닌파는 1921년 당 대회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중앙 당 기구를 확실하게 장악할 사람이 필요했던 레닌은 스탈린을 당 서기장에 올리는 안을 직접 제출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스탈린이 (1922년 4월에) 서기장에 임명된 것은 그가 행정적인 일을 따분해하지 않는 보기 드문 능력을 지닌 노련한 관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 레닌은 행정적인 이유보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스탈린을 선택했다. 레닌은 스탈린에게 사태를 제어하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2부 ‘당 지도자’․308쪽)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혁명의 길을 함께 갈 수 없는 영원한 적수였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자신이야말로 레닌의 적자라고 자임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목숨을 건 정통성 경쟁을 벌였다.

뛰어난 연설 능력과 지적인 능력으로 혁명가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트로츠키와 그루지야 시골에서 올라온 교양 없는 촌놈으로 폄하되었던 스탈린은 10월혁명 직후부터 사사건건 부딪쳤다. 내전 시기에 트로츠키가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장교들을 붉은 군대에 받아들인 것은 투철한 계급 투사 스탈린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맞선 스탈린은 레닌이 도입한 신경제정책을 두고도 맹렬한 논쟁을 벌였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는 권력 투쟁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보였으나, 실제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하부에서 당원들을 설득하고, 자기 세력을 조직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탈린이었다.


신경제정책의 성격이 점차 드러나자 1923년 10월에 트로츠키의 동료 좌파들이 신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46인 선언’에 서명하고 당 지도부의 조직 정책과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 그들은 토론의 자유를 더 확대하고, 산업 발전에 국가가 더 깊숙이 개입할 것을 요구했다. …… 그러나 1924년 1월에 열린 제13차 당 회의는 이 좌익 반대파들의 불충을 규탄했다. 당 지도자들은 트로츠키를 견제하기 위한 균형추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스탈린이 필요했다. 그들은 스탈린이라면 트로츠키를 똑바로 쳐다보고 정치적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2부 ‘당 지도자’․347~348쪽)


부상하는 중앙 지도부에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렇게 (스탈린처럼) 효과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 스탈린 못지않게 자신을 추종하는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트로츠키밖에 없었다. ……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처럼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잠재적 지지자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거만함이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스탈린의 전술적 노회함과 호전성이 결여돼 있었고, 트로츠키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의 우상(트로츠키)이 분파 투쟁을 할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트로츠키가 병석에 눕는 것은 신체적인 문제보다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2부 ‘당 지도자’․362~363쪽)


스탈린은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승리의 정점에 선 정치 전략가였다.

스탈린은 그 누구도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 예상 못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레닌조차도. 그러나 스탈린은 권력의 생리를 동물적 감각으로 꿰뚫어본 정치적 인간이었다. 권력 작동의 법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그는 권력의 하부를 장악했다. 일반 당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각 하부 단위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함으로써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스탈린은 강한 적과 연합하여 더 강한 적을 거꾸러뜨리는 이이제이 수법을 탁월하게 적용하였다. 그는 먼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해 트로츠키란 가장 강력한 적수의 힘을 제거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물리쳤다. 이때 연합 세력이었던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력화시켰다. 그는 서서히 노회한 혁명 투사들을 권력 핵심에서 제거하고 대신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끌어올렸다.


레닌이 죽은 뒤 정치국 회의는 스탈린이 아니라 카메네프가 의장을 맡아 이끌었다. 그러나 이미 스탈린은 자신의 미래를 돌보고 있었다. 스탈린은 조직국에서 경쟁자들이 자기와 손을 잡지 않으면 마음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들을 대체했다. 스탈린의 지휘 아래 스탈린 그룹이 형성되었다. …… 스탈린은 자기 집단 성원들에게 충성뿐 아니라 능력도 요구했다. 그는 자기처럼 혁명에 헌신적인 사람을 뽑았고, 가차 없는 정책을 통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적에게 무자비하다고 질책받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음모와 동지애, 남자들의 거친 농담이 뒤섞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자기를 위해 일하면 그들의 이익을 돌봐주었다. 그들의 건강도 챙겼다.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 단점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법으로 알았다. (2부 ‘당 지도자’․359~361쪽)


1927년 10월에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합동 전원회의에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가 정치국이 레닌의 유언을 묻어버리려 한다고 소리쳤다. 스탈린은 그들에게 맞설 준비도 되어 있었다.

“반대파는 스탈린의 무자비함이나 부하린과 리코프의 타협할 줄 모르는 태도 같은 개인적인 요소로 자신의 패배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야비한 변명입니다! 그것은 설명이라기보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입니다. 1904년에서 (1917년) 2월혁명 사이에 트로츠키는 멘셰비키들과 돌아다니며 레닌파를 공격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내내 트로츠키는 레닌파에게 잇따라 패배를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혹시 스탈린의 무자비함이 원인이었을까요?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중앙위원회 서기가 아니었습니다. 트로츠키와 레닌이 외국에서 싸우고 있을 때 그는 외국에 있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지하에서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정확히 어디서 스탈린의 무자비함이 그것에 영향을 주었을까요?”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설득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 합동 전원회의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했다. 1927년 11월 14일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당에서도 완전히 제명되었고, 이 결정은 12월에 제15차 당 대회에서 승인을 받았다. (2부 ‘당 지도자’․397~398쪽에서)


스탈린은 30년 동안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권력을 휘두른 무시무시한 공포의 조직자였다.

최고 권력자가 된 스탈린은 단 한 차례의 위기도 없이 자기 의지를 관철한 전제 권력자였다. 그는 공포를 일상화하여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자신이 겪은 시베리아 유형보다 훨씬 가혹한 강제노동수용소를 만들어 혁명 동지들, 의심이 가는 잠재적 배신자들을 몰아넣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공포 정치 기간에 약 150만 명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되었고, 이중 75만 명이 총탄 세례를 받고 사라졌다. 스탈린은 레닌 시절에 만들어진 좌익 반대파, 우익 반대파,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등등 모든 형태의 반대파들을 뿌리 끝까지 추적해 완전히 제거했다. 분파주의의 뿌리털도 남겨놓지 않고 도려내버린 비정한 근절 정치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한의 공포였다.


예조프는 스탈린과 몇 번이나 상의해 소련 전체에서 숙청할 인원을 할당했다. 그래서 아주 꼼꼼하게 헤아려 268,950명을 체포하기로 했다. …… 명령에는 정확히 몇 명을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낼 것인지도 적혀 있었다. 193,000명이었다. 나머지 75,950명은 처형될 것이었다. …… 스탈린은 엔카베데의 지속적인 대량 체포와 대량 학살로 자신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처치하려고 했던 것이다. ‘반소 분자’로 처단하도록 할당한 사람 수와 적대 세력으로 낙인찍힌 민족의 수가 몇 번이나 불어났다. …… 그는 늘 부하들이 공포 정치를 열정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당과 정부를 비롯한 모든 기관에서 수많은 사람이 무자비하게 잘려 나갔다. 목숨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 짓밟으라는 명령을 열심히 수행하는 길밖에 없다는 말도 나왔다. (3부 ‘공포 정치가’․541~542쪽)


스탈린은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5개년 계획을 실시한 1928년부터 1940년 사이 소련의 공업 성장은 연평균 12~14퍼센트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공업 생산량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국가로 부상하였다. 성공적인 산업화로 소련은 낙후한 농업국가에서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로 올라설 수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성장은 테러에 의한 국민 동원이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도달한 것이었으며, 그 뒤에서는 농민, 노동자, 정치적 반대파, 소수 민족들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다.


그는 ‘적’을 전 세계에 걸친 음모와 연결시키고 소련을 적대하는 외국의 첩보 기관과 연결시키려 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런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 그들은 늘 정치적으로 포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당내 반대파를 몰아내고 전국에서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들은 그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단지 그들을 비판만 하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없애버려야 할 쓰레기로 보았다. 이들은 모두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다. 소련 사회 전체가 원한이 사무쳤고, 다른 정치 지도부가 등장해 그들을 전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 1930년대에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야말로 위협적이었다. 물론 자신의 정책이 사태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그와 그의 정권이 위험하다고 생각할 만한 많은 이유가 있었다. 1920년대 말에 그는 나라 곳곳에서 증오받을 체제를 도입했다. 그의 말들은 공식 정책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에 조금도 의심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그를 숭배하는 집단은 이게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제1차 5개년 계획 때 쿨라크와 성직자, 네프만이 고통을 당했다. 만일 수백만 희생자가 살아남았다면 스탈린과 그의 정권을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터무니없는 공상이 아니었다. (3부 ‘공포 정치가’․530~532쪽)



서 평


재미있게 잘 읽히는 이 전기에서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권력 투쟁에 몰두했던 냉혹한 인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고립된 페르소나를 지녔으면서도 지도자로서 소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한 인간을 뛰어난 통찰력으로 그려냈다. 스탈린은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의 권위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하고 위압적이었다. 이 평전은 우리로 하여금 왜 모든 사람이 스탈린을 잔인한 권력자로만 기억하지 않는지를 분명하고 공정하게 생각해보도록 이끌어준다. - 리처드 오버리Richard Overy․《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저자


《스탈린》은 결함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재능이 풍부했던 스탈린이라는 정치가의 복합적인 내면 세계를 되살려냈다. 저자는 트로츠키가 주조한 스탈린의 고전적인 이미지에 도전해 그 이미지를 깨뜨린다. 이 책은 스탈린이 어떻게 마음속까지 철두철미한 계급 투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혁명 심장부의 권력 투쟁에서 일반 당원들의 믿음에 부응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 <가디언the Guardian>


《스탈린》은 풍부한 자료와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을 재구성했다. 서비스는 마치 벽돌을 쌓듯이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가며 스탈린을 공포의 조직자이기 이전에 생생히 살아 있는 인간으로, 그리고 러시아인들에게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체제의 설계자로 설명한다. 견고하고 재미있으며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다. -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한 인간의 삶과 시대를 웅혼한 스타일로 그린 평전. 《스탈린》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초상을 그루지야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크렘린에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한 형태로 재현했다. 지금까지 스탈린을 다룬 책에서는 그를 오로지 잔인함이라는 특징밖에 가진 게 없으며 그저 묵묵히 맡은 일만 하는 평면적인 인물로 그렸다. 그러나 서비스는 이 남자를 매우 지적이고 성실하며, 다양한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역동적인 인물로 살려냈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



지은이 * 옮긴이


로버트 서비스 Robert Service

러시아 혁명사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은 영국의 역사학자이다. 그는 19~20세기 러시아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사 분야까지 폭넓은 영역에 걸쳐 선구적 연구 성과를 낸 러시아사의 권위자이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배제하고 냉정한 분석을 앞세우는 그의 연구 방법은 학계와 평단의 찬사를 얻었으며, 치밀한 연구 태도와 방대한 자료 조사,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문체는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1947년에 태어났으며,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 후 에섹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교환 연구원으로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영국 킬 대학 교수를 지냈다. 1998년부터 옥스퍼드 대학 세인트 앤터니 칼리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영국학술원 특별정회원이다. 저서로 《Lenin:A Biography》《A History of Modern Russia》《Russia:Experiment with a People》 등이 있다.


윤길순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으며, 중원문화사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이성과 혁명》《건축 이야기》《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글로리아 스타이넘》《체 게바라》《유방의 역사》《세계 패션사》 등 다수가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