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_ 최의택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고, 읽고 나면 가슴이 찡해지는
경쾌하면서도 단단한 에세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과 만나기를 열망하는 한 작가의
평범하지 않은 분투기이자 모든 순간을 나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한 인간의 굴하지 않는 자기 탐험기!
배제와 소외를 주제로 삼아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어 온 작가 최의택이 시선을 내부로 돌려 자신의 장애 경험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은 저자가 근육병(선천성 근위축증)으로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되었던 경험에서 벗어나 자신의 장애 문제를 마주보고 직시하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유쾌하고도 묵직한 에세이다. 낄낄거리며 읽다 보면 가슴이 찡해진다.
휠체어를 타고 영화관에 가는 일의 고단함이나 시상식에 초대받으면 무대의 단차부터 걱정해야 하는 씁쓸함, 장애 보장구를 구입할 때마다 겪는 난감함 등 작가의 익숙한 일상 속에서 건져낸 에피소드들부터, 장애를 소재로 삼은 소설이 장애를 대상화, 타자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윤리적 고민에 이르기까지 작가 최의택의 경험과 생각이 한 편의 성장기 혹은 여행기처럼 펼쳐진다.
최의택의 문장들은 경쾌하면서도 단단하다. 길었던 10여 년의 작가 지망생 시절, 판타지를 쓰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음모론으로 빠져들고, 추리 형사물을 쓰던 중에 EBS 강의로 미적분까지 공부하고,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어색하다는 지적에 자연스러운 말투를 찾다 급기야 랩(rap)까지 불러댄 이야기들은 읽는 내내 독자를 웃게 만들지만 그 서툴고도 간절한 진심이 마음을 울린다. 이 책은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과 만나기를 열망하는 한 작가의 평범하지 않은 분투기이자, 모든 순간을 나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한 인간의 굴하지 않는 자기 탐험기이다.
최의택의 글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SF 작가’에게 기대하는 요소들을 슬쩍 재치 있게 내보이다가, 모른 척 툭 손에서 떨궈버린다. 키보드를 개조해 한 번에 한 자모씩 써 내려가는 사이보그적 글쓰기의 고단함(혹은 귀찮음)을 보여주다가도,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여겨본 적 없던 오랜 시간들에 대해 들려주는 등 그의 이야기는 시니컬함과 씩씩함을 오가는 역동적 매력을 가득 품고 있다. 입담에 이끌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최의택의 글은 어떤 이름으로도 라벨링할 수 없는, 오직 ‘최의택’의 글인 것이구나, 고개 끄덕이게 되는 개성 넘치는 에세이.
_ 소설가 김초엽
“장애인이 아닙니다, 장애 ‘경험자’입니다”
‘한 번에 한 자모씩’ 온 힘을 다해 눌러 쓴 최의택 이야기
이 책은 근육병 장애인이자 소설가이자 보통의 인간으로서 최의택이 겪은 ‘다른 몸’의 이야기다. 최의택은 어릴 적부터 근육병을 앓아 한 번도 걸어본 적 없고 평생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라봐 왔다. 펜을 쥐는 게 힘이 들고 책장을 넘기는 게 버거워지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세상과 단절된 채 집에서만 지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물 한 방울조차 못 마시는 그에게 삶은 자신의 ‘다른 몸’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각인하는 과정이었다. 최의택의 이야기는 개인의 남다른 경험이지만, ‘다른 몸’을 향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시선에 관한 것이기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힌다.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는 저자가 세상과의 단절을 예리하게 감각하기 시작한 열다섯의 어느 날부터, 쓰고 또 쓰며 버텼던 10여 년의 작가 지망생 시절의 기억들이 담겨 있다. 2021년 《슈뢰딩거의 아이들》로 문학상을 받고 세상에 다시 나오기까기 힘겹게 지나온 시간의 고군분투가 소설처럼 펼쳐진다. 2장에서는 자신의 장애를 바로 보기로 결심한 이후 장애학을 공부하고 자신보다 앞서 장애를 경험한 이들의 책들을 탐독하면서 비로소 느낀 해방감을 전한다. 자신의 장애를 외면하고 장애 이야기를 쓰는 일도 회피하던 과거와 장애 인물을 작품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 현재가 대비되며, 그와 그의 소설이 겪은 변화와 성장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마지막 3장은 저자가 오랜 시간 몸으로 익히며 체득한 글 짓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가상 세계’를 설계하는 방법과 등장인물과 소설의 제목을 구상하는 방식, 이야기를 쓸 때 그가 목표로 삼고 있는 ‘재미와 가벼움’의 진짜 의미 등등 SF 소설가로서 최의택의 독특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문학상을 받으며 마침내 데뷔를 하게 된 상황에서 내 장애명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빠졌다. 마치 그동안 대충 천으로 가려놓았던 싱크홀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의 평범했던 일상이 한낱 위장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턱밑까지 치고 들어와서 더는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후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태연한 척, 쿨한 척 ‘나는 그런 거 몰라요, 관심 없어요’ 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멍청할 수는 없지 않나 싶다. 그것은 절대 쿨한 게 아니었다. _ <프롤로그>, 10~11쪽
(에세이를 쓰면서 가장 조심스러웠던 지점은) 다름 아닌 ‘장애’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장애라는 따옴표를 씌우고 본다고 아쉬워하는 나조차도 장애라는 따옴표를 어쩌지 못해 고민하는 현실이라니. 이러한 고민은 소설을 쓸 때에도 피할 수가 없다. 내가 장애를 ‘소재’로 쓴 소설이 장애를 소재화, 대상화, 타자화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일조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나부터가 장애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거면 어쩌지? 만약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_ <에필로그>, 281쪽
“나는 글 쓰는 일에 나 자신을 던져버렸다”
_ 1장 따옴표 안의 ‘장애’
1장은 저자가 처음으로 자신을 ‘장애인’으로 바라본 기억에서 시작한다. 〈진짜 ‘장애인’이 되던 날〉은 저자가 중학교 2학년 때 받은 수술로 큰 후유증을 겪으며 자신의 몸이 또래와 영영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의식하게 된 순간들을 솔직하게 담았다. 〈실격하는 삶〉은 몸이 점점 약해져 학업마저 중단하기로 결정한 후에 느낀 허망함과 소외감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소설가를 꿈꾸면서부터 온몸으로 부딪쳐 가며 ‘무작정’ 글을 쓰던 시절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아임 소 소리, 존〉, 〈소설 쓰기와 책상 정리의 관계〉)에는 습작생의 서툰 진심이 잔뜩 묻어난다. 〈한 번에 한 자모씩〉은 최의택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인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오른손 엄지와 왼손의 힘을 이용해 특수 키보드와 초소형 컴퓨터를 조율하는 그의 글쓰기 방식은 ‘사이보그적’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 그가 왜 SF라는 세계를 낯설게 느끼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나는 마지막으로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단단히 고정한 다음 자퇴서에 서명했다. …… 나는 온몸을 들썩이며 대성통곡을 했다. 억억억 하면서 엄마랑 학교를 나서면서 그때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건 딱 하나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망함. 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내리치는 철퇴로 산산조각 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까. _ <실격하는 삶>, 33~34쪽
스티븐 킹이 “한 번에 한 단어씩” 쓴다고 하면, 나는 “한 번에 한 자모씩” 쓰는 셈인가? 결국은 같은 방식이기는 하지만, 속도 차원에서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호기심에 타자 연습 프로그램으로 속도를 측정해본 적이 있는데 분당 50타가 최대였다. 당연히 늘 그 속도로는 쓰지 못한다. _ <한 번에 한 자모씩>, 58쪽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만 지내면서 내가 결국 글을 쓰게 된 건 글쓰기가 물리적으로 가장 만만하기 때문이었다. 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는 내겐 읽고 쓰는 일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나는 읽고 쓰며 시간을 죽이고 살아 있는 나를 스스로에게 정당화한다. 이것이 사회운동인지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서 나에게 그런 일을 할 기회를 준다면 나는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_ <한 번에 한 자모씩>, 59~60쪽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0여 년을 사회적으로 유리된 채 산 나로서는, 장애인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대학원생이나 회사원보다는 사회적으로 주변부에 위치한 어린이, 경계에 선 청소년 쪽에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일단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청소년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저 그 관점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내 관점 자체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걸까. _ <‘슈뢰딩거의 아이들’을 만나기까지>, 68쪽
“장애를 알아 가며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제대로 보였다.”
_ 2장 처음인 건 나뿐이 아니었을지도
〈‘장애인’이 아닙니다, ‘장애 경험자’입니다〉는 제목 그대로, 그저 ‘장애’로만 규정되는 존재이기를 거부하고, 장애를 경험하는 ‘나’로서 서고 싶은 최의택의 바람과 의지를 담은 글이다. 〈만약 장애가 없었다면〉은 저자가 연례행사처럼 부모님과 술을 마시며 지금과 다른 현실을 상상하며 나눈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만약 장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떠올려보다 여전히 글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대목은, 저자에게 글쓰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휠체어’를 비롯한 장애 보장구를 구입할 때마다 자신의 ‘다른 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경험(〈선택이 아닌 필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불거진 장애 대상화, 타자화 문제에 대한 생각(〈‘우영우’라는 판타지〉)은 장애 당사자만이 품을 수 있는 고민의 깊이를 드러낸다.
뒤늦게 장애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다. 평소 장애인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는 쳐다보지도 않던 나로서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 권 두 권 읽으면서 나는 뭔지 모를 개운함을 느꼈다. 그동안 SF를 통해 접했던 ‘특수한’ 서사들이 마침내 내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여태까지 써 왔던 것도 사실은 그런 내용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비로소 제대로 보였다. _ <‘장애인’이 아닙니다, ‘장애 경험자’입니다>, 85쪽
내가 나의 장애를 수용하겠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는 탓에 생긴 제약과 사회적 장애 경험을 딛고 앉아서 장애인으로서 나의 삶을 주도하겠다는 뜻이다. 더는 나의 장애를 외면함으로써 나의 일부를 지우지 않고(그래, 나 장애인이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에 저항하고(나는 ‘장애인’이길 거부한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유리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따라서, 다시 나댈 것이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에세이 작업 또한 나의 장애 수용의 일환이다. _ <‘장애인’이 아닙니다, ‘장애 경험자’입니다>, 93쪽
휠체어나 스위치, 다른 보장구를 알아볼 때마다 나는 새삼스레 내가 기준에서 많이 벗어난 존재라는 것을 재확인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이란 인간 전체의 기준이 아니다. 인간 중에서도 신체 장애가 있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의 기준에서 나는 너무도 벗어나 있다. 나에게 값비싼 보조 기능은 선택이 아닌 필수고 그 때문에 선택의 폭은 거의 이차원 수준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곡예를 하듯 이루어진다. 그것도 일상적으로 말이다. _ <선택이 아닌 필수>, 142~143쪽
disabled person(장애인)과 person with difficulty(장애가 있는 사람)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갈등한다. 마치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소년처럼. ……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가에 대한 건 어쩌면 사소한 문제일지 모른다. 내가 장애인일 뿐이든, 장애가 있을 뿐이든, 오늘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늘을 나로서 내가 선택한 대로 사는 일이다. _ <스틸비>, 157, 158쪽
“글쓰기는 내게 유일한 탈출구이자 구원이었다”
_ 3장 SF라는 경이로운 세계
3장의 첫 글인 〈‘비정상적’ 존재의 외로움〉은 “왜 SF를 쓰는지” 묻는 이들을 향한 최의택의 유쾌한 항변이다. 저자는 자신을 전율하게 만들었던 SF 작품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자신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든 감각의 정체를 파고든다. 〈쓰기의 이유〉에서 저자는 “뭐든지 쉽게 질리는” 성향인 자신이 10여 년간 멈추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던 원동력을 찾아본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역시 글쓰기뿐이었다”는 그의 담담한 고백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나로부터 벗어나는 재미〉와 〈대상을 멀리 볼 수 있다면〉에서는 ‘재미’와 ‘가벼움’에 관한 최의택만의 정의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소설이 무엇인지 드러내 보인다.
나는 SF가 ‘비정상적’ 존재의 외로움을 다루기에 더할 나위 없는 도구라는 것을 그냥 알았던 것 같다. …… SF는 세계를 편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작가에게 주어지는 몇 안 되는 장르다. 물론 아무렇게나 막 만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작품을 읽는 사람이 그 가상의 세계를 방문하고 느꼈으면 하는 효과(대개는 읽는 이를 ‘소외’시키는)가 제대로 발생할 수 있게끔 설계해야 한다. 사실 중요한 건 효과이지 세계 자체는 아닌 것 같다. 꼭 세계일 필요도 없다. _ <‘비정상적’ 존재의 외로움>, 190쪽
문윤성SF문학상을 받기 직전까지 약 3년은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제2의 사춘기였다. 물론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아무리 써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현실이 분명 한몫 단단히 했다. 그럼에도 나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역시 글쓰기였다. 결국, 나에게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 버텨낼 다른 대안이. _ <쓰기의 이유>, 204쪽
다만, 나는 되도록이면 나와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인물들의 인생이 가능한 한 희극적이길 바라며, 그러한 가벼운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이 또한 외면일 수 있다. 기만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비극에 함몰돼 그 인물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것도 한낱 합리화에 불과할까? 지금 당장 매듭지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써 가면서 다듬어야 할 문제다. _ <대상을 멀리 볼 수 있다면>, 223쪽
내가 쓰는 글도 이제는 연습장이 아닌 세상에 퍼지고 있다. 가볍게 말이다. 그런 나의 가벼운 에너지가 누군가에겐 충전이 되는 에너지였으면 좋겠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으며 충전되었듯이 말이다.
_ <대상을 멀리 볼 수 있다면>, 225쪽
최의택
SF 작가. 장편소설 《슈뢰딩거의 아이들》 《0과 1의 계절》, 소설집 《비인간》을 썼다. 2019년 예술세계 신인상과 제21회 민들레문학상 대상, 2021년 제1회 문윤성SF문학상 대상, 2022년 제9회 한국SF어워드 장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근육병(선천성 근위축증)이 있다.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다. 평생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라봐 왔고 몸이 점점 힘들어져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세상과 단절된 채 집에서만 지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 글쓰기에 자신을 완전히 던졌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화상 키보드의 자모를 선택하고, 왼손에 온 힘을 실어 특수 키보드의 스위치를 누른다. 그렇게 10년 넘게 쓰기를 이어 왔고 마침내 《슈뢰딩거의 아이들》과 함께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에게 글쓰기는 탈출구이자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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