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_ 권김현영 엮음
성폭력 피해 고발을 어떻게 사회 변화로 이끌 것인가?
한국 사회 강간 문화를 낱낱이 해부하는 페미니즘의 언어
“여성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는 한 페미니스트 시인의 말은 이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으리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특정 집단 내 성차별 · 성폭력을 고발하는 ‘○○계 내 여성혐오/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한다. ‘꽃뱀’이라는 비난과 무고죄와 명예 훼손의 협박에 시달리며 ‘무결한’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한다. 일반적인 폭력 사건과 달리 유독 성폭력 사건에서만 피해와 가해라는 말이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무엇이 성폭력인가? ‘2차 가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 판단하는가? 성폭력 문제에서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성 문화(性文化) 연구 모임 ‘도란스’의 세 번째 책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은 성차별 · 성폭력 문제에 관한 주된 쟁점들을 ‘피해’와 ‘가해’ 개념을 중심에 두고 들여다본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자는 사상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그 이상이다.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드러내는 것, 성폭력은 ‘누구’ 혹은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목표이자 이 책의 목표이다.
피해자가 직접 나와 말해야만 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비상사태이며,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직접행동주의는 매우 힘이 세지만, 그만큼 당사자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준다. 모든 피해가 공론장에서 잘 이야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침묵도 더는 답이 아니다.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줄 각오를 하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던진 정치인은 성희롱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말을 직접 들었던,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대학생들은 정작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당시 한 기자는 나에게 대학생들이 기자를 지망하면서도 용감하게 나서지 않았다며 기자로서 이들의 자질을 의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를 비난하고 고립시키는 기제는 이토록 다양하다.
-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25쪽)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거듭 강조하건대, 피해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라 투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약자가 겪은 피해가 그대로 인정된다면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 누가 사회적 약자이며 무엇이 피해인지, 이 문제에 관한 복잡한 논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남성들은 피해 의식마저 남성 문화의 일부로 ‘소유’하고 있다. 가해자의 피해 의식, 피해자의 죄의식은 우리 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210~211쪽)
들불처럼 일어난 피해 고발의 목소리가
혁명적 변화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2018년 1월, 한 여성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고발 이후 한국 사회에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문화예술계, 법조계, 정치계, 학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에서 피해 고발이 이어졌다. 그런데 검찰 내 성추행 고발 직후 한 남성 시사평론가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일을 다루면서 “한국에는 미투 운동 같은 게 없었죠?”라고 말해 거센 비난이 일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가 “(지적으로) 게으르고” “오만하다”며 분노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과 공론화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2003년부터 매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하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2009년 배우 장자연 씨가 남긴 유서,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강남역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 2016년 10월 인터넷상에서 일어난 ‘#○○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2017년 11월 한샘 사내 성폭행 피해자의 고발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말하기는 계속되어 왔고 실제로 크고 작은 법적,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투’가 있었다.
그런데 성폭력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된 일이 이렇게 많았는데도 어째서 여전히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일까? 지금 이 폭발적인 ‘미투’ 운동을 근본적인 사회 변화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은 2018년 상반기 한국 사회를 뿌리째 흔들고 있는 이 뜨겁고 민감한 사안을 더 깊이, 더 멀리 보려 한다. 이 책은 유례없는 페미니즘의 대중화 시대를 맞아 성차별 ․ 성폭력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상의 정치로 지속시키기 위해 “미투 운동 이후”를 생각한다.
특히 ‘2차 가해’라는 용어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오용되고 남용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권김현영)와 “모든 여성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여성 우선’을 외치는 페미니즘 일부의 ‘정체성의 정치’가 야기할 수 있는 폐해를 성찰한다(정희진).
‘진실에 대해 말하기’는 언제나 어떤 것을 무릅쓰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말할 권리가 있다고 간주되지만, 그 말이 사회가 허용하는 영역을 초과하는 순간에는 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다. 피해자로서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이다. 광장에서는 누구나 말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말은 언제든 묻힐 수도 있고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진실에 대해 말하기’라는 행위를 선택한 자는 언제나 이런 시험대에 오른다. 시험대에 오른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 변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있다. 페미니스트 시인 뮤리엘 루키저는, “여성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67~68쪽)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권김현영)는 성폭력 피해자의 직접행동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현실과, 피해자의 ‘말하기’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필자는 성폭력이 본질적으로 이성애 중심주의와 젠더 권력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성차별 ․ 성폭력 문제의 밑바탕에 뿌리 깊은 ‘강간 문화’가 있음을 여러 사례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나아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진행된 반(反)성폭력 운동을 돌아보며 지속 가능한 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무엇이 부족했는지, 무엇을 더 사유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예를 들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등장한 ‘2차 가해’라는 용어와 ‘피해자 중심주의’ 담론이 오히려 피해자를 소외시키고 연대자와 지지자들을 위축시키는 한계를 드러냈음을 지적한다.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는 ‘문단 내 성폭력’ 고발자를 지지하고 연대해 온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이 쓴, 현재 진행 중인 고투의 기록이다. 이 글에는 피해 고발이 공론화된 이후 현실에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과 피해자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연대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증언과 지지의 말들을 모아 책을 출간하고, 펀딩을 통해 피해자들을 법률적 ․ 의료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연대자의 자격, 지지와 연대의 방식 등을 두고 숱한 논란이 벌어져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 글은 연대자의 위치를 끝까지 질문해본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토론과 고민 끝에 내놓은 것이다.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한채윤)은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송하고 ‘아웃팅’을 끔찍한 범죄로 보는 시각에, 소수자를 ‘피해자’의 위치에 가두고 길들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밝힌다. 필자는 먼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커밍아웃’과 “ㅇㅇ는 동성애자다”라고 폭로하는 ‘아웃팅’이 사회에 등장하게 된 과정을 살피면서 두 개념에 관한 상식을 뒤집는다. ‘커밍아웃’을 당당함과 용기의 표식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아웃팅’이 범죄가 되고,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너무 드러내지 말고 살아가라는 사회적 압력(‘커버링’)의 요구에 저항하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되면 정작 동성애자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루인)는 한국 최초로 ‘패닉 방어’를 단행본에서 다룬다. 이 글은 ‘피해’와 ‘가해’라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는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패닉 방어’란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살해한 가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를 변명할 때 사용하는 전략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별 정체성 혹은 성 정체성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아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것이므로 자신의 행위는 ‘패닉’의 결과로 일어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뒤섞는 ‘피해자 유발론’은 여성혐오나 성폭력 사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페미니즘의 오랜 의제이다.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니까, 야한 옷을 입고 다니니까 성폭력이 일어난다.” “여성이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과도하게 권리만 주장해서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 같은 식이다.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정희진)은 ‘피해자’로서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성 운동의 한계를 밝히고 타자와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놀랄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피해 여성들의 현실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며 “여성 우선”의 정치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여성 우선”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일명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라고 불린다. 쉽게 말하면 트랜스젠더 여성(특히 mtf, 즉 남성에서 여성으로)을 배제한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진정한’ 여성인가? 가장 심각한 피해는 누가 정하는가? 우선순위는 사회 정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필자는 정체성의 근거가 피해에 머무르게 되면, 여성들은 고통을 경쟁하고 피해를 자원으로 삼는, 남성 사회가 원하는 성 역할 수행 주체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침묵이 목소리가 되어 나올 때
-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하는 일이 확실히 늘어났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물적 조건과 소셜네트워크(SNS)라는 뉴미디어를 기반 삼아, 인터넷 의사소통에 능숙한 여성 대중이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직접행동에 나서면서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그렇다면 피해 경험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상황이 나아진 것일까? 하지만 “피해자의 용기 있는 직접행동으로 인해 겨우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도, 그 이후에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가해자들이 피해 사실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여론을 만드는 데 성공하거나, 연이은 폭로로 인해 피로감만 쌓이고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 글에서 권김현영은 성폭력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성폭력을 ‘피해자’와 ‘가해자’만 관련되는 ‘협의의 당사자성’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되며,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성폭력 피해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을 것인가?”
‘2차 피해’란 무엇인가
성폭력 2차 피해는 성폭력 문제를 여타의 폭력과 구분해주는 핵심적인 문제다. ‘2차’라는 뜻의 ‘second’는 ‘social’과 혼용된다. 성폭력 2차 피해는 다른 말로 ‘사회적 강간(social rape)’이라고 불린다. …… 피해자가 의료 조치 과정에서 적절한 배려와 설명을 듣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굴렸다”는 말을 듣거나, 언론이 사실 관계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가해자 입장만을 전달해 피해자를 사실상 꽃뱀 취급 하거나, 선정적인 표현으로 사건 자체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 역시 모두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즉, 2차 피해란 1차 피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잘못된 성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가 마주하게 되는 부당한 일을 총칭한다. (31, 33쪽)
성폭력은 성별 권력의 문제다
성폭력은 이성애 중심주의의 문제이자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남자도 성폭력을 당한다거나, 성희롱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말로는 성폭력이 왜 성별 간 권력의 문제이며, 이성애 중심주의의 문제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남자는 피해자가 될 수 없다거나 여자는 가해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사건들은 문화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남자와 남자 사이에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피해를 당할 만했다.”고 비난하는 문화는 없다. 여자 직장 상사의 성적 괴롭힘을 고발한 남자 직원은 남성성에 대한 고투와 낙인이 있을지언정 “큰일 하는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지는 않는다. (33~34쪽)
왜 여전히 피해자는 말하기 어려운가?
성폭력을 당해도 그것이 성폭력인지 몰랐거나, 성폭력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피해를 피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피해가 있었다’는 발견의 맥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말하기의 조건이 변화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말할 권리가 ‘민주화’되고, 말하는 주체가 필요에 따라 익명으로 감춰질 수 있는 조건의 변화는 말할 수 없었던 상황일 때보다 말하는 주체에게 ‘정당화의 의무’를 더욱 엄격하게 부과한다. 순결 신화의 규범적 힘은 약화된 반면, 남성 사회의 꽃뱀 공포는 더욱 강화되었다. 왜 지금 말하는지, 다른 목적은 없는지, 당시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경찰에 가지 않고 여론의 힘을 빌리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피해자의 증언이 믿을 만한 것인지 등을 가려내려는 여론의 검증은 예전보다 혹독하다. (49쪽)
“강간은 섹스가 아니다” -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
강간 문화란, 남성에게 성적 공격성을 장려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지지하여 성적 폭력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일련의 신념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소년 문화에서 강간은 정상적인 소년이라면 흔히 겪는 성장담으로 격려되어 왔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디시인사이드의 대학 갤러리에서는 “전쟁 나면 〇〇학과의 ××를 강간하고 싶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게시판 문화는 대학 내 익명 게시판과 단체 채팅방으로 이어졌다. ‘강간’이 남자끼리 즐기는 짜릿한 놀이 문화의 일종으로 ‘정상화’된 것이다. …… 강간 문화는 강간에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을 계속 퍼뜨리며, 섹스와 강간을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강간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남성들은 ‘강간 문화’라는 언급 자체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고 남성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항의한다. (58, 59쪽)
법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성폭력 관련 법 제도를 제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순결 신화와 강간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해 있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없다’. 피해자가 술을 마셨거나, 밤늦게 다녔거나, 가해자와 아는 사이였거나, 사적 공간에 드나드는 것을 허용했다면 말이다.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내가 거기를 왜 갔을까, … 왜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상대의 말을 믿었을까.) 성폭력 피해를 고소하지 않는다. 당사자 간의 법적 분쟁을 넘어서, 무엇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27~28쪽)
‘2차 피해’라는 말과 ‘2차 가해’라는 말
‘2차 가해’는 점차 ‘2차 피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2차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대신, “2차 가해자는 〇〇〇.”라고 말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전혀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전자는 2차 피해라는 용어에 내포된 개념과 사례에 집중하게 하고, 후자는 누가 가해자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 즉, 2차 가해라는 말은 가해를 저지른 행위자 자체에 주목하게 만든다. 앞서 설명한 대로 민주노총처럼 공동체의 규약에 대한 충성도(?)가 높거나 구성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2차 가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규제 효과가 있다. 토론을 하는 것보다 ‘확실’하다. 하지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조직이라면 ‘2차 가해’라고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그런 곳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그들끼리의 결속력을 더욱 끈끈하게 하며 피해자를 고립시켰다. (42쪽)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사회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그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에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채무자의 독촉처럼 취급하면,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피해자는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말을 의무로 생각하자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한 이들에게 부담을 주자는 게 아니다. 말하는 것이 더는 무엇인가를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70쪽)
‘말하기’ 이후, 연대와 책임에 대하여
-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2016년 가을, SNS에서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한 사람의 피해 고발 글을 읽은 또 다른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공론화하는 일이 이어졌다. 10여 명의 남성 소설가, 시인이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언론은 문단 내 성폭력 사태를 비중 있게 보도했고, 문예지들은 처음으로 이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말하기’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고발 직후 ‘자숙’을 말하던 가해자들은 곧 서로 연대했고 가해 사실 인정을 번복했다. 가해자들은 본격적인 ‘반격(backlash)’을 시작해 피해 고발자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라고 불리며 비난받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위로받는 일이 벌어졌다. 피해자들은 피해를 알리고 나서 상상도 못했던 싸움을 해야 했다.
이 글은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모인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의 기록이다.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비리가 아무렇지 않게 발생하고 은폐될 수 있는 ‘문단’이라는 가부장적 사회의 구조, 그런 사회에서 남성 권력이 폭력을 통해 실행되고 정당화되는 과정, 피해를 공론화한 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결성된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의 활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문단’이라는 가부장적 사회
회사나 학교 등의 조직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폭력 상담소 같은 기구를 만들어 온 것과 달리, 이러한 해결 기구가 없는 문단의 기괴한 구조가 그 민낯을 드러낸 것이 바로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이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신고할 곳이 문단 내부에 없으니, 피해자들은 매번 개인으로서 법적 투쟁을 했고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후 무사히 문단에 복귀해 왔다. 피해자는 문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삭제된 여성 문인들을 암암리 모르지 않기에, 피해자들은 더더욱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81쪽)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 내 성폭력 발화, 싸움, 연대의 기록이자 피해 고발자를 지지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피해 고발자의 증언 글, 여성 작가들의 자기 성찰의 글을 한데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면서, 그 수익금을 피해 고발자들의 법률 비용과 의료비 지원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 펀딩을 시작한 지 2주 후, 프로젝트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SNS에서 ‘E’가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였다. E는 5년 전 데이트 폭력 가해자로 출판사 봄알람(텀블벅 펀딩 진행과 단행본 제작 및 출간을 맡은 출판사)의 구성원을 지목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봄알람 구성원은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했고 피해자가 요구한 사항들을 이행했다. 관심이 뜨거웠던 만큼 논란과 비난도 뜨거웠다. (87, 90쪽)
연대자의 자격
우리(준비팀)는 ‘무결’한 사람들의 운동으로 이 운동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문단이라는 네트워크 안에 함께 있었던 작가로서, 성찰을 하고 자기 자신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함께하는 여성 문인’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명단에 왜 저 사람의 이름이 있는지” 그 자격을 따지는 제보가 이어졌다. 준비팀은 명단 참여 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 참여 여부는 자발성에 맡기겠다는 원칙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왜 명단에 있는가, 저 사람은 왜 명단에 없는가. 한 치의 흠결도 없는 도덕적 순결함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 프로젝트 참여자에 대한 가혹한 도덕적 검열이 계속되었다. (97~98쪽)
연대와 책임
봄알람 구성원은 퀴어 담론의 피해와 가해에 대한 인식의 부재 속에서 고통받았다. 흡사 연좌제처럼 봄알람 출판사 전체가 가해자로 지목되었으며,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파트너였던 준비팀도 가해자라는 프레임에 함께 갇히게 되었다. 가해자 프레임 속에서 준비팀의 모든 조치와 행위와 입장은 반성 없는 폭력 행위이거나 자기 합리화, 혹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로 취급되었다. 연대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었다. 우리는 ‘누가 가해자인가’보다는,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했어야 했다. 2차 가해에 대해 발언할 때에도 무엇이 성폭력 피해를 의심하게 하고 성폭력 고발을 어렵게 하는지를 질문했어야 했다. (108~109쪽)
공론장으로서 SNS를 생각하다
트위터 공론장에는 누구에게나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반복적으로 발언하며 발화를 독점하는 사람들이 부각되는 반면,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은 유령처럼 지워지고 말았다. 입장문과 사과문이 빠르게 오가는 공론장 특유의 속도 때문에 침착함과 신중함이 배제되는 경우도 있으며 섬세한 논의가 어려워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을 망각할 위험도 컸다. 성폭력 없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모두의 목적이 희미해지도록 모두가 방치한 셈이 되었다. (113~114쪽)
‘가련한’ 약자, ‘순결한’ 피해자이기를 거부한다
-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소수자는 사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약자이자 피해자인가? 왜 사회는 소수자가 당당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지배 규범에 거슬리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자는 어떻게 세상에 맞서야 하는가?
‘커밍아웃’을 개인의 용감한 결단으로 만들수록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기회를 놓치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성애자임이 폭로되는 ‘아웃팅’은 분명 두려운 일이지만 이런 ‘아웃팅’을 방지하려고 애쓸수록 동성애자의 존재는 더 ‘위험’해진다. 동성애자라고 너무 유난 떨지만 않는다면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는 ‘커버링’은 교묘하게 동성애자를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길들인다. 한채윤은 이 글에서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문제를 통해 동성애자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순적 상황을 분석해보려 한다. 또 낙인찍힌 자들에게 더 빨리 솔직하게 말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말하면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는 사회적 성찰을 요구한다.
벽장 속에 누가 살고 있는가
커밍아웃은 단순히 개인의 사생활과 은밀한 비밀을 밝힌다는 의미가 아니다. 커밍아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 그 숨겨진 구조를 밝히는 단어다. …… 동성애자가 우리 주변에 평범한 이웃으로, 가족으로, 친구와 동료로 존재한다는 것, 이 세상은 이성애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급 비밀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동질감으로 사회 공동의 규범과 성 역할을 만들어놓았기에 비밀은 늘 위태위태하다. 즉,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129, 132쪽)
커밍아웃에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다
내가 커밍아웃 후 관계가 어그러진다면 그들이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것이지, 나의 커밍아웃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할 때 우리는 개인이 감당할 몫과 나를 포함하여 사회가 감당할 몫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그 각각의 몫의 경계를 구분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커밍아웃 후 집에서 쫓겨나거나 주변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거나 해고나 사퇴 권유와 같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개인이 겪는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공동의 실패다. 피해를 입은 이들 곁에 서서 함께 싸워 나갈 이들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공동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135~136쪽)
‘아웃팅은 범죄’라는 인식
커밍아웃이든 아웃팅이든 드러나는 것은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커밍아웃이 우리 존재를 억누르는 벽장의 차별적인 구조를 밝히는 것, 숨겨야만 한다고 강요받는 낙인을 오히려 드러내어 자유를 얻는 전략임을 상기할 때 아웃팅 역시 마찬가지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커밍아웃을 원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아웃팅 역시 원하지 않을 것이다. …… 아웃팅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를 막아야 하는데 ‘아웃팅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은 아웃팅 자체를 범죄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웃팅을 ‘당했다’는 말은 곧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이 되었고, 아웃팅을 ‘시켰다’는 말은 가해자를 지목하는 일이 되었다. (138, 139쪽)
커버링, 티 내지 말라는 가장 교묘한 억압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 참가자들의 노출이 심하다는) 비난은 성적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사회를 잘 설득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참가자들 때문에 성적소수자 전체가 욕을 먹는다고 비난한다. 건전한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동성애자가 아무리 단정한 옷차림을 한다고 해도 건전한 존재로 칭송받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건전이라는 잣대가 이미 이성 간의 사랑, 결혼, 성생활로 짜여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인 채로는 건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이 동성애자에게 ‘건전’을 권장하는 이유는 이성애자와 유사해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게 만들 수는 있기 때문이다. (152쪽)
‘순결한’ 피해자의 위치를 거부하며
이성애자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성애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이성애자 중심의 질서를 지키면서 그 안에서 동성애자의 자리를 만들자고 하는 모든 요청들을 거부해야 한다. 같아지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무리 없이 섞이고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남들과 ‘다른’ 나로서 살아야 한다. 다르다는 ‘티’를 일부러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티’가 저절로 나는 것이다. 우리는 순응하라고, 적당히 넘어가라고, 너무 유난 떨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 한 점 부끄럼 없고 당당하고 무결해야만 인정받는 피해자, 상처받아 웅크린 가련한 약자, 주류의 배려와 관용을 기다리는 소수자로서의 위치를 거부해야 한다. (155쪽)
어떤 폭력의 이유
-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
2010년 5월 말, 대구에서 트랜스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많은 언론은 가해자가 “(4년여 전 알게 된) 자신의 교제 상대가 트렌스젠더인 사실을 뒤늦게 알고 격분해 살해”했으며 “성별을 알 수 있는 접촉은 갖지 않아 상대방이 여장 남성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며 가해자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 가해자가 내세운 논리는 전형적인 ‘트랜스 패닉 방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루인은 이 글에서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살해한 가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를 변명할 때 사용하는 전략인 ‘패닉 방어’를 다룬다. ‘패닉 방어’는 혐오 폭력과 혐오가 발생하는 구조 등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사람이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라고 먼저 밝히지 않은 것이 상대에게 심각한 충격을 안겨주고 그리하여 구타, 감금 혹은 살해를 유발할 정도의 ‘잘못’인 것일까? 피해자가 사라지면 혐오도 사라지거나, 피해자가 자신의 특정한 속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혐오가 발생하지 않을까? 한편, ‘패닉 방어’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페미니즘의 오랜 의제인 ‘피해자 유발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피해자 유발론은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교묘하게 뒤섞는다.
혐오 폭력,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피해자 유발론’
‘피해자 유발론’은 여성 혐오나 성폭력을 둘러싼 의제에서 특히 많이 거론된다. 예를 들면 “여학생의 학교 성적이 좋아 남학생의 손해가 크다.”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밤늦은 시간에 돌아다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다.” 같은 식이다. 이것은 가해자 자신의 범죄 사실, 혹은 특정 집단의 무능력 따위를 그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 타인으로 인해 ‘내’가 부당한 일을 겪고 있다는 인식이다. …… 페미니즘의 오랜 반(反)성폭력 운동은 피해자 유발론이 가해자를 옹호함으로써 사회의 통치 체제(가부장제)를 보호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했다. (161, 162쪽)
“나는 게이와 섹스를 할 수 없어.” - 이성애-남성성과 ‘게이 패닉 방어’
재판정에서 게이 패닉 방어 논리를 펼치는 가해자들 역시 바로 지배 규범적 남성성을 중시하고 강요하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호모포비아를 동원해 자신을 방어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게이 남성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은 자신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행위이자 자신이 게이로 오해받을 수 있게 하는 행위이기에 가해자 중 한 명은 피해자를 살해한 후 “나는 게이와 섹스를 할 수 없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 이성애자 남성성을 남성의 유일한 남성성 실천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태도가 없다면 패닉 방어 전략은 재판 과정에서 수용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애당초 전략으로 채택되기 어렵다. (168, 169쪽)
“나야말로 진짜 피해자” - ‘트랜스 패닉 방어’와 기만의 논리
트랜스 패닉 방어는 가해자 남성이 연애나 성관계의 대상으로 ‘여성’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여성이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았으며 음경 형태의 외부 성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패닉 상태에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 트랜스 패닉 방어 전략은 외모를 통해 타인의 섹스(혹은 외부 성기 형태)와 젠더(혹은 겉으로 인지되는 이원 젠더 범주)를 즉시 그리고 어떤 실수 없이 파악할 수 있으며 이 둘은 언제나 등치한다는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 바로 기만이라고 주장한다. …… 여기서 mtf/트랜스여성을 살해한 많은 가해자가 사실은 “나야말로 기만당하고 사기당한 진짜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 (174, 177, 178쪽)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회
패닉 방어 혹은 피해자 유발론은 피해자를 처벌하고 가해자를 구제하며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회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특히 패닉 방어와 피해자 유발론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살인 사건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뒤섞는다. 무엇이 가해이고 무엇이 피해일까? 사회적 인식에 따라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무고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가해와 피해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역학 관계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가해와 피해를 뒤섞는 작업이 가해자 개인의 일탈적 혹은 지능적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지배 규범,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비난과 부정적 인식이 공모해 철저하게 규범적 과정을 통해 성립한다는 점이다. (199~200쪽)
‘사회 정의’로서 페미니즘을 생각하다
-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언제나 연대의 정치였다. 그런데 이 연대의 정치를 부정하는 페미니즘이 등장했다. 이들은 피해 여성의 현실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며 “여성 우선”의 정치를 주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의 사회 운동에서 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받으며 ‘나중’으로 미뤄졌다. 정희진은 “여성 우선”을 주장하며 자신 외의 다른 여성들에게는 “나중에”를 외치는 여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정한’ 여성인가? 가장 심각한 ‘피해’는 누가 정하는가? 여성의 정체성을 ‘피해자’로 한정하는 페미니즘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희진은 이 글에서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피해’,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 개념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그리하여 “모든 여성은 피해자”라고 강조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성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여성주의에 불리한 전략임을 밝힌다. 나아가, ‘여성 우선’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타자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공감과 연대에 토대를 둔 ‘사회 정의’로서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피해’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정치의 산물이다
인류 역사상 사회적 약자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해와 피해는 일상이지만,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 피해는 인정 투쟁, 집단 행동, 사회 운동, 여성주의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실천을 통해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저절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는 존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해자 되기’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위치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208, 211쪽)
정체성의 정치로서 페미니즘
정체성의 정치로서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인 보편성에 차이를 제기함으로써, ‘인간=남성’이 아님을 주장한 급진적인 정치였고 현재도 그러하다. 여성이 여성에게 동일시하는 문화가 없었을 때, 여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체성의 정치는 억압받는 개인이 억압받는 약자의 집단에 자신을 ‘소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종의 정치적 귀향으로서 ‘노예’에게도 집이 있다는 (잠시지만) ‘안도의 정치’인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이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나 가부장제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은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사유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민주화하는 과정을 낳는다. (216쪽)
‘피해’를 여성의 본질로 받아들인다는 것
삶도, 투쟁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과의 차이를 깨달은 ‘다음 날’ 여성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차이와 이로 인한 문제를 남성적인 방식으로 봉합하기 시작하면, 정체성의 정치는 타락하기 시작한다. 여성 정체성의 정치가 빠지기 쉬운 함정에 걸려든다면, 즉 피해는 여성의 본질이며 여성은 피해자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은 또다시 보편성(uni-versal)으로 묶이게 된다. 이것이 페미니즘 사상사에서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이 그토록 비판받았던 이유이다. (218쪽)
모든 여성은 ‘여성’으로서 동일한가?
여성들은 당연히 동일하지 않다. ‘우리’는 여성인 동시에 인간임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여성이기보다는 흑인이거나 노인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젠더 시스템은 1) 개인을 남녀로 분리하고 2)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며 3) 같은 성별끼리는 같은 속성(남성성, 여성성)을 공유한다는 규범을 전제한다. 이것은 차별을 위해 차이를 만드는 것이며, 가부장제가 인간을 필사적으로 남녀로 구별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은 여성들 사이의 다름과 같음을 논의한다. “차별은 나쁘다. 하지만 차이는 인정되어야 한다. 다양성이 중요하다.”라는 평등주의는 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차이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차별이라는 점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215쪽)
타자와 연대할 것인가, ‘피해자’가 될 것인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된다. 여성은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과 유혹을 느낀다. ‘피해자다움’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중요한 성 역할이다. 물론, 피해자화는 여성의 불가피한 생존 전략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은 피해자성을 자원으로 삼거나 그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성이 타자화, 피해자화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제까지 온존한 생존이 가능했을까. …… 그렇지만 피해자성을 중심에 둔 페미니즘은 타자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보고, 나의 고통을 타인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권리’를, 여성은 ‘고통’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사회적 약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이다. 타자와 연대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 세력이 원하는 피해자가 될 것인가. (224~225쪽)
지은이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언니네방1, 2》, 《남성성과 젠더》의 편저자이고,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성폭력에 맞서다》, 《대한민국 넷페미사》, 《페미니스트 모먼트》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언니네트워크 등에서 일했고, 여러 대학에서 “젠더와 정치”, “대중문화와 섹슈얼리티”,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서 공부하고 있다. 트랜스젠더퀴어 인식론을 모색하고 그 정치학으로 역사와 문화를 다시 쓰고 있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등을 함께 썼고, 《트랜스젠더의 역사: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를 함께 번역했으며, <젠더, 인식, 그리고 젠더 폭력: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메모, 네 번째>(2013) 등의 글을 썼다.
정희진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서강대학교 글쓰기센터 강사. 저서에 《혼자서 본 영화》, 《낯선 시선》, 《아주 친밀한 폭력》, 《정희진처럼 읽기》, 《페미니즘의 도전》이 있으며,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의 편저자이다. 그 외 50여 권의 공저가 있다. 300여 편이 넘는 책의 서평과 해제를 썼다.
한채윤
1997년 PC통신 하이텔 내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모임인 ‘또하나의사랑’의 대표시삽을 맡으면서 성적 소수자 인권 운동을 시작했다. 잡지 <BUDDY>의 편집장과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를 지냈고, 현재는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의 퍼레이드 기획단장과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한채윤의 섹스 말하기》가 있고 공저로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등이 있다.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2017년에 결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참고문헌 없음》을 기획했다.
차 례
들어가는 글 – 우리는 피해자라는 역할을 거부한다 _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_ 권김현영
들어가며
‘2차 가해’라는 문제 설정
피해자 중심주의와 판단 기준
문제는 강간 문화다
나가며 - 피해자의 권리에서 모두의 의무로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_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
들어가며 - <탈선>, 우리가 목격한 미래
‘문단’이라는 가부장적 사회
드러난 이름과 드러나지 않은 이름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자격과 무결
“너라도 빠져나와.”
연대와 책임
맺으며 - 남은 숙제들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_ 한채윤
들어가며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역사
커밍아웃을 감당할 준비는 되었는가
아웃팅의 딜레마,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커버링에 응하지 않기
나가며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 _ 루인
혐오의 가시화와 그 정치학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란 무엇인가
혐오를 통해 이성애-이원 젠더 구성하기 : 대구 트랜스 패닉 방어 사건
규범을 질문하기
맺으며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_ 정희진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여성주의 언어
피해는 사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정치의 산물이다
정체성의 정치
여성의 몸과 피해자 정치성의 정치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아와 페미니즘
젠더는 여성이 아니며,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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