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_ 카렌 암스트롱
Muhammad _ Karen Armstrong
“이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책”
_ New York Times
탐욕, 오만, 불의에 맞선 정신의 혁명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종교의 창시자,
이슬람의 이상적 인간 무함마드의 매혹적인 초상!
대다수 종교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 신앙의 이상을 표현하는 상징적 인물이 있다. 기독교의 예수와 불교의 붓다가 그러하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를 안다. 붓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종교 집단, 약 19억 명이 믿는 종교인 이슬람을 대표하는 인물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예수와 붓다에 비해 역사적 자료가 많은데도 무함마드의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서구 문화권에서 무함마드는 위대한 인물이기는커녕 ‘테러리스트’ ‘미치광이’라고 비난받기 일쑤고, 무함마드가 일으킨 ‘이슬람’은 본래 광신적이고 폭력적인 종교로 적대시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인물이 1400여 년 동안 변함없는 존경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이슬람과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무지와 뿌리 깊은 편견을 해소하려는 첫걸음이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무함마드》에서 이슬람 초기 역사 기록, 이슬람 경전 ‘쿠란’, 여러 문헌 자료 들을 통해 서기 6세기부터 7세기까지 예언자 무함마드가 등장한 아라비아 반도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무함마드의 삶을 매우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다.
610년경 신의 계시를 처음 받았을 때 무함마드는 마흔 살의 가장이자 아라비아의 부유한 상업 도시 메카에서 성공한 상인이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 23년 동안 비폭력과 관용의 정신으로 영적 공동체를 건설해 세계사의 흐름을 바꿀 종교의 토대를 닦았다. 무함마드는 폭력을 앞세운 사람이 아니었다.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신학적 논쟁이나 형이상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바꾸려 노력했다. 무함마드의 삶은 탐욕과 불의와 오만에 맞선 ‘지하드’, 즉 끊임없는 내적 투쟁이었다.
저자는 신비주의자로서 무함마드뿐 아니라, 과감한 결단력과 뛰어난 판단력을 갖춘 정치가,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개혁가로서 무함마드를 더없이 생생하게 그려낸다. 열정적이고 복잡하며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 정치적 재능과 영적 재능을 두루 갖춘 카리스마적 지도자, 일신교적 비전을 통해 대중의 가장 깊은 불안과 갈망에 응답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제 우리 눈앞에 되살아난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공감 어린 태도로 그려낸 매우 인간적인 예언자의 초상화. _ Wall Street Journal
전 세계 무슬림 대부분이 자신들의 예언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탁월하게 보여준다. 카렌 암스트롱의 전기는 이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_ New York Times
경배하지 않으면서도 정중하고,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지적이며, 무엇보다 아주 잘 읽힌다. 무함마드를 온전한 인간으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_ The Economist
이슬람 예언자와 그가 등장한 배경에 대한 묘사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 것이다. _ Library Journal
“끔찍한 재난을 피하려면 서로 관용을 베푸는 것을 넘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슬람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을 넘기 위한 첫걸음
오늘날 이슬람은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신자(약 19억 명)를 보유한 거대 종교이다. 한국에서도 무슬림(이슬람교도)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이미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까지 합치면 우리나라의 이슬람교도는 2018년 기준 약 26만 명”이고 그중 “한국인 무슬림만 6만 명”(한국이슬람교중앙회 추산)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은 여전히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에 포위되어 있다.
지난 7월 29일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사우스포트의 어린이 댄스 교실에 괴한이 침입해 흉기를 휘둘러 어린이 3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건 직후 체포된 범인이 무슬림 이민자라는 가짜 정보가 온라인에 퍼지면서 영국 전역에서 극우 세력의 반이민, 반이슬람 시위와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범인은 영국 웨일스 태생이었고 무슬림도 아니었다.
한국의 경우는 2018년 제주에 예멘 난민 5백여 명이 입국하면서 일어난 찬반 논쟁이나 2021년 대구 북구에서 이슬람 사원 건축을 두고 건축주 쪽과 반대 주민들 간에 벌어진 갈등에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이슬람 공포증(Islamophobia)’을 확인할 수 있다. 반대 주민들은 공사를 방해하고 “이슬람은 사람을 죽이는 악마 종교” 같은 혐오 문구를 쓴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대구 이슬람 사원을 둘러싼 갈등은 4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세계 곳곳에서 사회를 분열시키는 혐오 폭력의 불씨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종교 간 상호 이해의 다리를 놓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을 알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무함마드는 신의 대변자로서 자신이 전한 신의 계시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이슬람의 이상이 되었다. 모든 무슬림은 평생에 걸쳐 예언자의 통찰과 실천을 본받아야 한다. 따라서 무함마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아는 것이야말로 이슬람과 무슬림들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무슬림들의 경전 쿠란은 그들에게 모든 구성원이 존중받는 정의롭고 훌륭한 사회를 만들라는 사명을 내렸다. …… 예언자 무함마드(570~632)의 삶은 처음부터 줄곧 이슬람의 이상을 펼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무함마드가 걸어간 길은 불가해한 신의 활동을 이 세상에 드러냈고 모든 인간이 신을 향해 실천해야 하는 ‘완전한 내어줌’(‘이슬람’이 아랍어로 ‘내어주다’라는 뜻이다)을 보여주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살아 있을 때부터, 무슬림들은 예언자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힘써야 했다. (9~10쪽에서)
서구 문화에는 십자군 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가 오랜 ‘이슬람 공포증’이 있다. 12세기에 유럽의 기독교 수도사들은 이슬람이 칼을 앞세운 폭력적인 종교이며 무함마드는 상대 세계가 원하지 않는데도 무력을 앞세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한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
우리는 더는 이런 편견을 방치할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을 이용해 서구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맞서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그런 편견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폭력을 앞세운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무함마드의 중요한 성취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삶에 균형 잡힌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14~15쪽에서)
“계시를 받을 때면 언제나 내 영혼이 나에게서 찢겨 나가는 듯했다”
폭력과 불안의 시대, 아라비아 반도에 나타난 예언자
카렌 암스트롱은 무함마드가 활동한 서기 6세기~7세기 아라비아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살피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라비아 반도의 험한 지형과 기후 때문에 아랍인들은 대대로 유목 생활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다 6세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시장 경제가 흥성하고 물질적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다. 무함마드가 살았던 도시 메카는 아라비아에서도 번성하는 상업 중심지였다. 하지만 부를 향한 냉혹하고 탐욕스러운 경쟁 속에서 공동체가 약자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던 오랜 전통이 사라지고 불안이 널리 퍼졌다. 유목민 시절에 유익했던 다신교 신앙은 이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그렇게 오래된 가치들이 사라지는 폭력적인 사회에 살았다. 메카의 성공한 상인이었던 무함마드는 무모함, 오만, 이기주의가 사회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우려했고 일찍이 새로운 영적 해결책의 필요성을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기 610년경 신의 계시를 처음으로 받게 된다.
그 일을 체험한 후 무함마드는 극심한 고통 속에 바위투성이 비탈길을 내달려 아내에게 갔다. 후에 돌이켜 보니 그 일을 말로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가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와, 압도적인 힘으로 몸을 부둥켜안고는 숨 한 모금도 남김없이 모든 걸 쥐어 짜내려는 듯했다. …… 무함마드는 서기 610년 ‘라마단’ 달에 이 놀라운 체험을 했으며, 나중에 이 체험을 ‘라일라 알-카드르’(운명의 밤)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해서 자신이 아라비아 최고신 알라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22쪽에서)
자초지종을 들은 와라카는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며 크게 기뻐했다. “만약 내게 한 말이 진실이라면, 카디자, 전에 모세에게 왔던 위대한 신이 그에게 온 것이니, 보아라, 그는 그의 사람들의 예언자이다.” 그 후 와라카는 하람에서 무함마드를 만났을 때, 무함마드의 이마에 키스하며 그의 과업이 쉽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다. …… 무함마드는 절망감을 느꼈다. 메카 밖에서의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쿠라이시족에게 쫓겨날까요? 무함마드는 절망감 속에 물었다. 와라카는 무함마드에게, 예언자는 언제나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고 슬프게 말했다. (54쪽에서)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사회 개혁
불평등과 오만을 비판하고 자비와 겸손을 설파하다
처음에 무함마드는 소수의 친구와 가족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알리면서 조용히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아랍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신의 예언자임을 확신하고 열정적인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소수였고 무함마드는 곧 메카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가 메카의 불평등과 사회 분열을 비난하고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는 메카에 잠재해 있던 단층선을 드러냈다. 수년 동안 젊은이와 노인, 부자와 가난한 이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걱정스러운 분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위험한 일이었다. 한 구절씩, 한 수라씩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경전은 이러한 불평등을 비난했다. 한 파벌은 필연적으로 다른 파벌의 손에 고통받을 것이었다. 스스로 분열하는 사회는 세상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기에 파멸할 것이다. …… 무함마드는 만약 쿠라이시족이 태도와 행동을 개혁하지 않으면 그들 역시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는 무질서와 혼란의 먹잇감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64~65쪽에서)
당시 쿠라이시족은 약자를 멸시했다. 실패와 가난은 본질적으로 고귀함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하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삶의 모든 순간에 자신이 알라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자신도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며 경외심과 경이감으로 오만함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생명체, 인간, 신 앞에서도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는 교만한 태도와 오만한 자립심을 내려놓을 것이다. (75쪽에서)
“쿠란을 듣고는 마음이 평온해졌고 나는 울었다.
그리고 이슬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개종자 우마르)
‘이슬람’과 ‘쿠란’의 의미
무함마드의 종교는 ‘이슬람(islam)’이라 불리게 된다. 이슬람은 아랍어로 ‘내어주다’라는 뜻이며 이슬람을 믿는 사람(무슬림)은 곧 신에게 자신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내어놓은 사람이다. 이슬람의 중요한 의례인 ‘살라트’(기도)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함마드는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태도를 길러줄 의례적 행동을 가르쳤다. 첫째는 함께 만나서 기도하는 것(살라트)이었다. 그들은 경건하게 엎드림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매일 떠올릴 것이다. …… ‘살라트’의 신체적 반복 행위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알라에게 내어주는 것(이슬람)을 상징했다. 그것은 이성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그들의 몸을 가르쳤고, 거만하게 행세하고 싶은 자기 중심적인 충동을 내려놓도록 가르쳤다. (75~76쪽에서)
무함마드는 610년경부터 63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23년 동안 자신이 신에게서 직접 메시지를 받는다고 말했고 그 메시지가 모여서 ‘쿠란’이라고 불리는 텍스트가 되었다. ‘쿠란’이라는 단어는 ‘암송’을 뜻한다. 쿠란은 혼자 읽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전처럼 큰 소리로 낭송하게 되어 있었고, 소리도 중요한 의미의 일부였다. “개종한 이들은 처음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낭송하고 나중에는 숙련된 쿠란 암송자들이 낭송하는 신성한 음성을 들었을 때 알라와 즉시 대면하고 있다고 느꼈다.”
무함마드의 개종자들은 새로운 계시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무함마드가 새로운 계시를 암송하면 그들은 그것을 암기했고, 글을 쓸 줄 아는 이들은 글로 적었다. 그들은 경전의 절묘한 언어에 감동과 흥분을 느꼈고, 그 정도로 훌륭한 말은 신에게서 올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아랍어를 모르는 사람은 쿠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번역해서는 그 아름다움이 거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67쪽에서)
쿠란은 의도적으로 반복했다. 그렇게 되풀이되는 내적 메아리가 개념, 이미지, 이야기를 결합했고, 교육적으로 유용하게도 강조점이 조금씩 변화하면서 중심 가르침이 강화되었다. …… 쿠란은 즉각 전달될 수 있는 사실 정보는 전하지 않았다. 청중은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가르침을 천천히 흡수해야 했다. 그들의 이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심오해지고 무르익었으며, 쿠란의 풍부하고 암시적인 언어와 리듬은 그들이 정신의 속도를 늦추고 다른 의식 상태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68~69쪽에서)
추방당한 예언자
메디나 이주와 새로운 공동체 건설
무함마드가 이끄는 평등주의적인 종교는 메카 주류 세력의 분노를 샀다. 기득권 가문들은 무슬림을 박해했고 예언자를 암살하려 했다. 결국 무함마드는 622년에 자신의 부족인 쿠라이시족과 메카를 떠나, 메카 북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야트리브로 향해야 했다. 무함마드에 앞서 무슬림 70명이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야트리브로 이주했다. 쿠란은 무슬림들이 메카에서 “추방되었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야트리브는 곧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메디나’로 불리게 된다.
무함마드는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일을 감행하고 있었다. 메카의 무슬림들에게 야트리브로 ‘히즈라’(이주)를 요청하고 있었다. 이는 단지 거주지를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친족을 버리고 낯선 이들의 영구적 보호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부족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가치인 아라비아에서 이는 신성 모독에 가까운 행위였다. …… 야트리브로 ‘히즈라’를 실행한 무슬림들은 장차 ‘무하지라’(이주민)라고 불리게 된다. 이 충격적인 이주는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132, 133쪽에서)
움마의 지도자로서 무함마드는 이제 메카에서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도덕적, 사회적 개혁을 실행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의 목표는 ‘힐름’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무민)은 단순히 “신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신앙은 실제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기도를 해야 하고, 재산을 나누어야 하고,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는 움마의 일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공동체 내에서 서로 의논”해야만 한다. (143~144쪽에서)
모세와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
이슬람은 정말 배타적인 종교인가?
오랫동안 서구에서는 이슬람을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개종을 강제하는 배타적인 종교로 여겨 왔다. 실제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독하거나 이슬람만이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무슬림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모두 이슬람의 전통과 동떨어진 것이다. 쿠란과 무함마드의 삶, 특히 메디나에서 행적이 그 증거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어울려 살게 된 유대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또 쿠란에 따르면 무슬림은 유대인과 기독교도를 예의 바르게 대하고 존경해야 한다. 이 가르침은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쿠란은 계시가 한 예언자에게서 다른 예언자에게로 전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메시지는 연속성을 지닌 이야기로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마엘과 이삭에게, 그리고 모세 등으로 전해진다. 쿠란은 간단히 말하면 그 이전 경전들의 “확증”이며, 토라, 복음서, 쿠란은 간단히 말하면 신이 연속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 속의 순간들이다. (120쪽에서)
“이슬람(신에게 자신을 내어줌) 외에 다른 종교를 추구하는 자 결코 수락되지 않을 것이니 내세에서 패망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 이 구절은 이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며 오직 무슬림만이 구원받을 거라고 쿠란이 주장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이슬람’은 아직 무함마드가 이끄는 종교의 공식 명칭이 아니었으며, 다원론의 맥락에서 정확히 읽는다면 명확하게 정반대의 의미임이 분명하다. (120쪽에서)
무함마드는 또한 무사브에게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 오후에 특별 기도회를 열고, 욤 키푸르에는 유대인들과 함께 금식하라고 지시했다. ……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계시를 받은 ‘딘’(종교, 삶의 방식, 도덕 법칙)을 가지고 있었으니,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의 개종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은 각 공동체마다 고유한 예언자를 둘 것을 명했다. (131쪽에서)
지하드와 히잡
이슬람은 본래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인 종교인가?
암스트롱은 무함마드가 오랫동안 힘든 ‘지하드’에 전념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하드’는 오늘날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본래 ‘성전(holy war)’이라는 뜻이 아니다.
아라비아 스텝에서는 침략 전쟁이 찬사를 받았지만, 쿠란에서는 자기방어만이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적대 행위였고 선제공격은 비난받았다. 전쟁은 언제나 끔찍한 악이지만 예배의 자유와 같은 온당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때로 필요했다. 이 부분에서도 쿠란은 다원론을 버리지 않았다. 모스크(사원)뿐만 아니라 유대교 회당과 교회도 보호되어야 한다. (157쪽에서)
(‘지하드’라는) 단어는 신의 뜻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노력’ 또는 ‘분투’를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지적, 사회적, 경제적, 영적인 면과 가정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이러한 노력에 힘쓰도록 강력하게 권고받는다. 때로는 싸워야 할 때도 있지만 싸움이 주된 의무는 아니었다. 바드르 전투 후에 메디나로 돌아오는 길에 무함마드는 자주 인용되는 중요한 발언을 했다. “우리는 ‘작은 지하드’(전투)에서 돌아와 ‘큰 지하드’로 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사회와 자신의 마음을 개혁하는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투쟁을 의미했다. (167~168쪽에서)
한편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일부다처제와 히잡을 도입했다. 일부다처제와 히잡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는 성차별적 제도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지만, 무함마드 시대에는 오늘날과 의미가 달랐다.
쿠란의 일부다처제는 일종의 사회 법규였다. 그것은 남성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잃은 여자, 부모를 잃은 아이, 그 밖에도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여자처럼 취약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가해진 불의를 바로잡고자 고안되었다. …… 약자들은 남성 보호자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거나 재산으로 취급당해 노예로 팔리는 일도 많았다. …… (일부다처제에 따라) 남자는 부인을 오직 4명만 얻을 수 있으며 모든 부인을 공평하게 대해야 했다. 부인들의 재산을 탐욕스럽게 차지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사악한 행동이었다. (180, 181쪽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부인들을 재산으로 여기지 않았다. 부인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무함마드의 “동료”였다. 무함마드는 보통 전쟁 원정에 부인 한 명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매일 저녁 시간을 부인과 천막에서 보내 지휘관들을 실망시켰다. 부인들은 진영에서 조용히 틀어박혀 있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보이며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 머지않아 다른 여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자신에게 권한이 주어졌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무함마드의 적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움직임을 이용해 예언자의 평판을 깎아내리려 한다. (182~183쪽에서)
‘히잡’ 구절들은 지금까지 엄청난 논란이 되어 왔다. 이 구절들은 결국 예언자가 죽고 약 3세대가 지난 후에, 모든 여성이 베일을 쓰고 집 안 별도 공간에 분리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쓰인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 …… 그 지시는 모든 무슬림 여자가 아니라 무함마드의 부인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무함마드가 적들에게 받은 교묘하게 위장된 위협, 무함마드 개인 공간에 대한 공격적인 침범, 무함마드의 부인들이 거의 매일같이 당하는 모욕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210~211쪽에서)
가장 멀리 내다볼 줄 알았던 지도자
비폭력이 가져온 최종 승리
메디나로 이주한 후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은 메카와 5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무함마드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때로는 전쟁이 불가피하며 심지어 필요하다고 믿었다.”(167쪽) 하지만 무함마드는 형세가 유리해지자 놀라운 전환을 보여준다. 전쟁을 중단하고 비폭력 정책을 펼친 것이다. 628년에 무함마드는 승리를 앞둔 듯했던 시점에 메카에 많은 양보를 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포기했다. 이 조치는 많은 무슬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후퇴로 보였던 조약은 결국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온다.
‘참호 전투’에서 쿠라이시족을 물리친 후에는 계속 압박을 가하고 일방적으로 공세를 퍼부어 끝장내버리는 것이 누가 봐도 당연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무함마드의 의도가 아니었다. 메카의 몰락은 쿠라이시족의 상업적 수완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낙후 지역 아라비아에는 상상도 못할 재난이 될 것이며, 또한 쿠라이시족은 전쟁으로 양측 모두 파괴적인 분노와 증오가 쌓여 가는 동안에는 이슬람의 의미를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무함마드는 경제 봉쇄를 포기함으로써 쿠라이시족의 마음을 얻기를 바랐다. (230~231쪽에서)
휴전은 처음에는 가망 없어 보였지만 이슬람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이전에는 끊임없는 싸움과 커져 가는 증오 때문에 아무도 앉아서 이성적인 태도로 새로운 종교 이슬람에 대해 토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휴전이 성립되고 사람들이 안전하게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 이슬람에 들어오지 않고 지적으로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628~630년 사이에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들어왔다. (237쪽에서)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영국의 종교학자. 1944년 잉글랜드 우스터셔에서 태어났다. 1962년 열일곱 살에 로마가톨릭 교회 수녀원에 들어갔다 7년 만에 환속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런던대학에서 현대 문학을 강의했다. 종교학자로 삶의 방향을 바꾼 이후 《축의 시대》《신의 역사》《신의 전쟁》 같은 논쟁적 저작을 발표했고, 《마음의 진보》 같은 울림이 큰 성찰적 저작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최고의 작가가 되었다.
2008년에 종교 간 화해와 평화를 위해 활동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자유 메달’을 수상했으며, 개개인의 동정심 회복을 위한 전 세계적인 비전을 제시하며 ‘테드(TED) 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 문화 간 이해를 증진하는 데 공헌한 바를 인정받아 ‘나예프 알-로드한 세계문화이해 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2015년에는 ‘대영제국훈장’을 받았고, 2017년에는 에스파냐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스투리아스 공주 상’을 받았다. 암스트롱의 저작은 지금까지 전 세계 4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김승완
역사 전문 번역가. 서강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사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역서로 《처음 읽는 유럽사》《만들어진 유대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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