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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사회과학

인권의 최전선

by 교양인 2020. 8. 14.

 

인권의 최전선 _ 조효제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인권을 위한 새로운 상상력

 

반독재 민주화가 인권 운동의 최우선 과제였던 시대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민주주의가 상식인 사회, 보편적 인권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는 ‘인권의 시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에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권 문제가 계속 등장해 사회적 혼란을 빚고 있다. 미투 운동, 예멘 난민 사태,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거부,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불거진 인권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 자유의 한계를 묻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인권 발전의 길은 본래 끝이 없는 여정이다. 과거에 비해 개인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늘어났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억압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사회가 진보해도 과거부터 존재했던 인권 문제가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떠오르거나 전혀 새로운 인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몰랐거나, 숨어 있었거나, 정당한 권리로 인정받지 못했던 고통과 욕구가 새롭게 발언권을 얻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동으로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까다로운 인권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는데 요즘 젊은 애들은 뭐 그리 불만이 많은지.” “이만하면 먹고살 만한데 왜 허구한 날 인권 타령인가.” “인권이 밥 먹여주나.” 얼핏 일리 있게 들리는 이런 말들은 인권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책은 인권이 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자동적으로, 순리대로,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어째서 세상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여전히 곳곳에 빈틈이 많고,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두세 개의 문제가 새로 발생하는가? 이 책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권에 관한 관한 혁신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이를 위한 인권 공부의 길을 제시한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인권 공부의 길잡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인권과 관련해 흔히 제기되는 질문들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난민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학생 인권과 교권이 충돌한다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왜 차별금지법을 만들자고 하는지, 인권에는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것인지 등등은 단번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민주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 시민들이 해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권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인권 쟁점을 지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마음의 문을 열고 민주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곧 인권 공부의 핵심이다. 열정적으로 논쟁하되 그렇게 도출된 결론 역시 특정 시점에서 내린 ‘잠정적 결론’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모든 문제에서, 영원히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인권 공부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인권은 기본 개념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정답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주입식 암기로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따져보고 민주적으로 논쟁하면서 찾아가야 하는 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인권 공부의 길잡이가 되고자 한다. 홀로코스트와 현대적 인권 개념의 탄생, 기후 위기와 인권, 증오 범죄, 과거 청산 등을 다루는 이 책에 실린 63편의 글은 자국 중심, 개인 중심의 권리 개념을 뛰어넘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인권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인권의 ‘역사적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시대별로 사람들이 유독 민감하게 느끼는 사회적 고통이 있다. 그것이 당대의 인권 감수성이다. 국왕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질렸던 시대에는 ‘법의 지배’만 확립해도 정말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다. 모든 책을 검열하던 시대에는 ‘출판의 자유’만 보장되어도 숨 쉬고 살겠다고 믿었다. 1987년 유월항쟁 때에는 ‘고문 없는 세상’과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무척 많이 등장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편한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시대별로 특유한 억압 권력이 나타나 인권 문제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인권 문제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문제가 존재하거나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인권 문제가 유난히 도드라질 뿐이다.

이것을 인권 열차에 비유해보자. 인권 열차의 기관차와 각 차량은 각각 다양한 인권 문제를 상징한다. 기관차에도 엔진이 있고 각 차량에도 엔진이 있다. 열차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도 밀어주어야 움직인다. 시대별로 기관차의 선도 구실을 하는 인권이 달라진다. 예전에 ‘법의 지배’가 인권 열차의 기관차였다면 오늘날에는 ‘페미니즘’이 기관차가 되었다. 앞으로 시대가 바뀌면 또 다른 이슈가 기관차가 되어 인권 아이콘 구실을 할 것이다. 이런 점을 볼 줄 아는 눈이 인권의 역사적 감수성이다.

- 1장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84, 85쪽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는 인권의 최전선에서

미래 인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 처음으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규정하는 인권 목록이 만들어진 후,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인권의 종류는 대략 일흔 개다. 인권의 종류는 고정되지 않으며, 시대를 거듭하며 그 개수를 늘려 가고 있다. 자유권, 평등권, 참정권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부터 오늘날에는 건강권, 생명권, 환경권, 성소수자·여성·노인·이주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까지 과거에는 인권 문제로 상상할 수 없었던 권리가 인권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 새로운 권리 주장이 폭발적으로 등장할수록 인권 개념도 함께 확장되는 것이다.

이 책은 다가올 미래 세계의 화두가 ‘인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인권 이야기로 가득하다. 젠더 정체성, 증오 범죄, 기후 위기, 신자유주의, 전염병, 친환경 미래 에너지 등 전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슈를 지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절박한 인권 과제로 제시한다.

 

《인권의 최전선》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에서는 범죄자 독방 구금, 과학 기술과 인권, 스포츠 인권, 제주어 등 토착어의 소멸, 노인의 고독 등 과거에는 인권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이슈를 인권의 영역으로 확장해 살펴본다. 법과 제도가 중심이던 인권 개념을 넘어서 우리 삶 곳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새로운 차원의 인권을 만난다.

2장 ‘녹색 인권 시대가 온다’에서는 코로나19, 미세 먼지, 녹지화, 기후 위기, 신재생 에너지, 건강과 질병 등 최근 중요한 권리로 떠오른 ‘환경권’, ‘생명권’, ‘건강권’과 관련한 인권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 특히 전염병, 폭염, 폭우, 기근이 가져오는 심각한 인권 침해와 그 피해의 불평등성을 ‘지구화’와 ‘기후 위기’와 연결해 살펴본다.

3장 ‘더 깊은 인권 감수성이 필요하다’에서는 인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쉽게 체념하거나, 반인권적 표현이 늘어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인권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최근 늘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격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세계인권선언’, ‘비엔나 선언’, ‘국제인권규약’ 등 현대 인권 개념을 발전시켜 온 문헌을 살피며 인간 존엄이라는 인권의 본질적 가치를 재확인한다.

4장 ‘지구촌 인권의 미래를 묻는다’에는 미국, 독일, 폴란드, 네팔 등 저자가 세계 각지에서 목격한 다양한 인권 현장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인종 차별, 인신 매매, 총기 문제, 증오 범죄, 홀로코스트 부정, 가짜 뉴스 등 전 세계를 들썩이고 있는 인권 이슈를 한국 사회와 연결해 살펴본다.

5장 ‘인권-평화 국가로 가는 길’에서는 촛불 집회, 대통령 탄핵, 예멘 난민 사태, 코로나19까지 격랑의 시대를 헤쳐 온 한국 인권의 현주소를 인권학자의 관점으로 진단한다. 또한 우리 사회 인권 운동과 인권 교육의 역할에 대해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본문 미리보기

 

‘고독’이라는 이름의 고문

2016년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 무려 43년간 독방에 갇혀 옥살이를 한 앨버드 우드폭스라는 재소자가 석방되는 일이 있었다. 우드폭스의 사례는 독방 구금과 고독 상태가 인간에게 육체적·정신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교도소 안에서 규정을 위반할 때 내리는 징벌 중 최고 수위인 독방 구금은 환청, 환시, 공황장애, 폐소 공포, 망상, 기억 상실, 무기력, 우울 등 심리적·정신적 장애를 일으켜 심각한 인권 유린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이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는 이유는 처분을 받는 이들이 바로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죄짓고 감옥에 들어간 주제에 독방에 갇히는 건 당연하다.”는 말은 정당한가?

저자는 범죄자를 포함해 실직자, 노숙인, 쪽방 거주자, 독거노인, 은둔형 외톨이 등 사회에서 가장 경멸받고 배제된 사람의 처지를 인권 문제로 볼 줄 아는 것이 그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오랜 독방 구금자들은 심한 뇌진탕을 당한 환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뇌파 기능이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방 구금이 몸과 마음을 함께 파괴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고독 자체가 고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고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에서 분리되면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 1장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ㆍ41쪽

 

언어 다양성과 생물 다양성

19세기에 캐나다를 정복한 백인들은 원주민을 주류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토착어와 고유 문화 박탈, 정체성 혼란 등으로 원주민들은 고통을 겪었다. 식민지 시대 억압적 언어 정책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언어를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권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다. 최근에는 문화적·환경적 권리가 새로운 인권 의제로 등장하면서 언어와 환경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언어 다양성과 생물 다양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언어가 사라질수록 생물의 종류도 함께 줄어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제주어가 소멸하는 현실을 살피면서, 언어 권리가 한 집단이 자기 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 인간 생존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제주강정해군기지, 개발과 부동산 투기 광풍, 비자림 도로, 신공항 건립과 같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소멸의 길에 들어선 제주어를 함께 기억한다. 제주어의 운명이 제주의 문화, 제주의 환경, 제주도민의 생존권과 거대한 인과의 그물망으로 연결된다는 진리를 개발론자들은 알고 있을까. - 1장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ㆍ79쪽

 

‘기후 위기’가 ‘인권 위기’다

코로나19는 현재 아시아, 러시아, 북미, 오스트레일리아, 중동, 북아프리카, 유럽 등 전 세계 212개국으로 확산되었다. 2020년 8월 기준 확진자가 2천만 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약 75만 명에 다다른다. 전 세계인이 ‘생명권’과 ‘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받았고, 경제, 사회 활동, 교육, 보건 등 여러 분야에서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저자는 자본과 사람뿐 아니라 바이러스와 재난까지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번 사태를 ‘지구화’와 ‘기후 위기’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코로나19와 기후 위기를 연결할 줄 아는 ‘생태적 상상력’이 인권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고통을 준 코로나의 발생 원인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코로나 피해자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코로나가 발생한 원인 그 자체, 즉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왜 별로 들리지 않는가? 지구 곳곳에서 생태 학살(ecocide)을 저지르고 있는 개발 산업, 온실가스 배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각국 정부, 그리고 화석 연료 산업을 지속시키는 에너지와 발전 기업에 대해서는 왜 인권의 이름으로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가? - 에필로그ㆍ378, 379쪽

 

인권 침해도 ‘불평등’하다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에볼라 사태에서 유독 여성의 감염률이 높았다. 아픈 환자를 돌보는 사람 중 여성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에 있던 중국 후베이성의 경우 여성 의료 종사자 비율이 90퍼센트에 다다랐다. 이처럼 여성은 재난의 사각지대에 있다. 저자는 “재난 자체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발생하더라도 그것의 피해는 반드시 불평등하게 경험된다.”고 지적한다. 건강과 질병을 젠더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새로운 인권 의제로 떠올라 ‘젠더 불평등’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제 인권 운동과 보건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성 건강의 젠더적 분석 방법은) 건강, 여성 인권, 젠더 평등, 젠더 규범성, 젠더 편견, 여성 리더십의 차원을 따져보면서 젠더적 요소가 계급, 빈곤, 인종, 민족, 성적 지향 같은 구조화된 사회 불평등 현실과 어떻게 교차하고 변형되고 심화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돌봄 역할을 많이 수행하기 때문에 지역 사회의 전염병 상황을 누구보다 더 빨리 포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젠더적 접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인구 집단 모두에게 득이 되는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 2장 녹색 인권 시대가 온다ㆍ147, 148쪽

 

‘표현의 자유’라는 딜레마

‘표현의 자유’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려는 목적에서 나온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다. 동시에 ‘표현의 자유’는 어느 선까지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대표적인 인권 의제이기도 하다. 내용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주장을 보호한다고 할 때, 표현의 자유 원칙에 반대하는 주장까지 보호해야 하는가? 네오나치나 일베처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혐오를 퍼붓는 집단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표현의 자유는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지, 모든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 ‘권장’한다는 말이 아니다. ……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한 백신 주사의 항체라는 기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때에도 시민의 공적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으면 제일 좋다. 강제 조치는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 3장 더 깊은 인권 감수성이 필요하다ㆍ158~161쪽

 

밀레니얼 세대의 인권 의식 현주소

2016년 한 언론사에서 한국, 브라질, 덴마크,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자기 나라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지 묻는 설문을 진행했다. 부정적 응답률 중 한국인이 40퍼센트로 제일 높았다. 특히 20대 54퍼센트가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저자는 설문 조사의 결과를 인권에 적용하여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다시 태어나도 내 나라를 택하겠다는 사람이 인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이다. 이것은 미래 지향적이고 낙관적인 인권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인권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절박한 인권이 된다. “이런 나라에서 내 한목숨 지켜야 하니 악착같이 권리를 찾을 수밖에 없어.” 이것은 비극에 가까운 인권이다. 이러한 인권 담론이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후자의 인권 담론이 가득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자존감이 낮고, 자신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기 쉬우며, 대안을 상상하기도 어렵고 타인과 자신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이런 곳에서 호명되는 인권은 절망과 불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똑같은 문제 제기라 해도 그것이 나타나는 맥락에 따라 이처럼 전혀 다른 양태로 인권 담론이 통용된다. - 3장 더 깊은 인권 감수성이 필요하다ㆍ210, 211쪽

 

증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최근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증오 범죄가 늘고 있다. 인종 차별부터 외국인 혐오,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혐오, 반무슬림, 장애인 혐오까지 범죄 동기도 다양하다. 이런 증오는 어디서 오는가? 저자는 증오 범죄를 이해하려면 우선 증오 범죄가 발생한 맥락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정치적 맥락의 조건을 살펴보자. 권위주의 성향의 지도자 출현, 난민의 대량 유입, 극단적 포퓰리즘, 불안정한 정부 구성, 가짜 뉴스와 유사 뉴스, 왜곡 뉴스를 양산하는 새로운 정치 커뮤니케이션 방식, 민주 세력의 지리멸렬을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 경제적 맥락의 조건을 살펴보자. 특히 세계적으로 악화된 불평등 구조가 중요하다. 사회가 불평등할수록 사람들의 허탈감, 시기, 열등감, 불만, 우울, 타자와 자신을 향한 공격 성향이 늘어난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압력은 사회의 약한 틈새인 소수-약자 집단을 희생양 삼아 터져 나오기 쉽다. - 4장 지구촌 인권의 미래를 묻는다ㆍ278, 279쪽

 

그렇다면 증오 범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저자는 빈부 격차를 줄이는 사회·경제 정책을 시행하고, 모든 종류의 ‘낙인찍기’와 ‘희생양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을 인권의 핵심 과제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차별금지법 제정도 우리 사회의 증오 범죄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우선 반드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하고 싶다. 혐오·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을 보장한다는 국가가 왜 필요한지를 입증하는 차원에서 실천해야 할 일이다. - 5장 인권-평화 국가로 가는 길ㆍ354쪽

 

 

인권을 통합적 관점으로 봐야 하는 이유

어떤 사안을 놓고 찬반이 확연하게 갈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잘잘못만 따지는 논쟁인가, 전체 맥락까지 보는 논쟁인가. 현재 이야기만 하는가, 역사적인 차원도 말하는가. 한국 사회만의 문제인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인가. 이런 점을 파악하려면 사회학적 시각이 필수다. …… 인권 문제를 권력의 원근법으로 파악할 수 있고, 핵심적인 문제와 부수적인 문제를 가릴 수 있으며, 인권을 총체적이고 전 지구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1장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ㆍ81~83쪽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인권 운동은 인권 문제에, 환경 운동은 환경 문제에 집중하는 게 맞지 않는가?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이 세상의 이치다. 점점 더 좁아지고 점점 더 서로 의존하는 세계에서 문제를 하나의 각도에서만 풀려고 해선 안 된다. 인권은 인권이 자리 잡고 있는 사회와 세계의 넓은 맥락 속에서, 다른 여러 분야와 연결해 통합적으로 접근할 때 문제가 제대로 보이고 해결책도 제대로 찾을 수 있다. - 에필로그ㆍ379, 380쪽

 


 

지은이_조효제

성공회대학 교수이자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이다. 런던대학 정치외교학 학사, 옥스퍼드대학 비교사회학 석사, 런던정경대학(LSE) 사회정책학 박사이다. 한국인권학회장,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기획단 위원, 하버드대학 인권펠로, 코스타리카대학 초빙교수,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유엔 본부 학술대회 기조 강연자 등을 지냈다.

저서로 《조효제 교수의 인권 오디세이》, 《인권의 지평》, 《인권의 문법》, 《인권을 찾아서》, 《Human Rights and Civic Activism in Korea》 등이 있다. 역서로 《인권사회학의 도전》, 《인권의 대전환》, 《세계인권사상사》, 《거대한 역설》, 《직접행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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