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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인문학

[프랑스혁명사] 책 소개

by 교양인 2018. 6. 22.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혁명사》 국내 최초 완역판!

 

 

 

비할 데 없이 선명하게 그려낸 프랑스혁명의 웅대한 서사
알베르 소불을 최고의 프랑스혁명사가로 끌어올린 현대의 고전

 

알베르 소불(Albert Soboul, 1914~1982)은 프랑스혁명에 관한 지식을 깊고 넓게 확장한 탁월한 혁명사가이다. 소불의 대표작인 《프랑스혁명사(La Révolution Française)》는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읽힌 고전적 저작이자, 최고의 프랑스혁명사 안내서로 인정받는다. 소불은 장 조레스, 알베르 마티에, 조르주 르페브르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혁명사 연구의 적통을 이어받아 거대한 사회 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의 진면목을 웅대한 규모로 집대성했다.
소불은 프랑스혁명 10년에 대한 섬세하고도 열정적인 탐구를 통해 혁명의 진정한 물음에 응답했다. 어떻게 이런 거대한 변혁이 가능했는가? 혁명의 주역들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고 그들 자신을 변화시켰는가? 이 책은 겉멋 부리지 않는 명쾌한 문체로 프랑스혁명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고 전개되었는지 놀랍도록 생생하게 보여준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탁월한 안내서인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프랑스혁명의 전개 과정과 이 혁명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혁명사》 국내 최초 완역판!
국내 최고의 프랑스혁명사 학자 최갑수 교수의 번역으로 만난다

 

《프랑스혁명사》는 알베르 소불이 수행한 학문적인 대(大)작업의 첫 결실인 《프랑스혁명사 개설》(1962년 출간)의 개정판이다. 초판본 축약판이 1984년에 국내에서 출간된 적이 있지만, 개정판 정본이 완역되어 출간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이다. 국내 최고의 프랑스혁명사 연구자인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최갑수 교수가 우리말로 새로 옮겼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혁명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실증적인 연구 성과가 많이 축적되면서 소불은 《프랑스혁명사》를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1982년 소불은 전면적인 개정 작업에 착수했지만 그해 급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타계했고, 개정판이 유작으로 출간되었다.

본문을 수정하고 내용을 첨가한 소불의 작업을 이어받아 제자들이 본문을 정리하고, 소불이 사망 한 해 전에 발표했던 논문 두 편 <혁명적 군중>과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실었다. 이로써 프랑스혁명 연구에 관한 프랑스 전통 사학계의 해석을 대표하는 ‘최후의 종합적인 프랑스혁명사’가 완성되었다.
《프랑스혁명사》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부’에서는 18세기 말 구체제 프랑스의 경제 동향에 관한 소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삼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을 상세히 다룬다. ‘1부·2부·3부’에서는 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 공화국이 몰락하고 총재정부가 집권한 1799년까지 프랑스혁명 10년의 진전과 성쇠를 부르주아와 민중이라는 혁명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흡인력 있게 그려 간다. 마지막 ‘결론부’에서는 프랑스혁명이 프랑스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 불러일으킨 쟁점이 무엇인지 다루면서 프랑스혁명의 특수성과 현재적 의의를 보여준다.

 

 

왜 여전히 소불을 읽어야 하는가?

 

“프랑스혁명은 인기를 잃었다. 역사적 의미는 여전히 인정받고 있지만, 평판은 추락했다. 대중과 학계의 많은 이들에게 프랑스혁명은 근대 세계에서 폭력, 공포 정치, 전체주의, 그리고 심지어 집단 학살(제노사이드)의 전조가 되었다.” 영·미의 혁명사학계를 대표하는 이가 ‘미국역사학회(AHA)’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 증언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의 역전인가? …… 모든 혁명이 단두대에 오른 것은 아니다. 혁명은 ‘좋은’ 혁명과 ‘나쁜’ 혁명으로 분류되었다. 영국혁명과 미국혁명은 폭력과 유혈 사태를 동반하지 않은 ‘좋은’ 혁명으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기타 모든 제3세계의 혁명들은 모두 엄청난 인권 유린을 부른 ‘나쁜’ 혁명으로 치부되었다. ……

우리가 이런 일련의 수정 해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기존 질서(특히 자본주의)를 문제시하는 모든 근본적인 물음을 불온시하는 순응주의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를 현재 및 미래와 단절하는 모든 학문적 시도는 이데올로기의 공세일 뿐 참된 의미의 역사학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소불을 여전히 읽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학은 과거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낯설게 봄으로써 성찰하는 것을 학문적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역사의 견인차’인 혁명을 반혁명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아무리 아카데미즘의 외피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비역사적이요, 심지어 반역사적이다. 소불의 이 책은 프랑스혁명이라는 과거에, 그 주인공들과 심지어 희생자들에게조차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 ‘역자 후기’에서

 

 

프랑스혁명을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프랑스혁명사》는 구체제 부르주아와 혁명의 무대 뒤편에 존재했던 도시 민중과 농민을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혁명을 재구성한다. 다양한 부류의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주도했지만, 지배층의 분열 속에서 도시와 농촌의 민중이 대거 혁명 무대에 진입했음을 밝힌다.
알베르 소불은 민중의 관점에서 프랑스혁명을 서술하여 ‘아래로부터 보는(vue d’en bas) 역사학’을 이룩한 장 조레스의 연구 성과를 이어받아, 엄청난 사료 작업을 거쳐 ‘농민 혁명’과 ‘민중 혁명’이 존재했음을 입증했다. 부르주아지가 주인공이지만 도시 민중과 농민이 개성이 강한 조연 역할을 하는 거대한 사회 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질적인 동시에 통일된 전체인 혁명적 군중들의 구성에 관한 정확한 상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이 바로 파리의 ‘서민’이다. …… 이 혁명적 군중들은 사회적 유대가 단절된 주변인이나 “독립적인” 개인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하여 빈곤 때문에 무질서로 빠지기 쉽고 선동가들에게 쉽게 동원될 수 있으며 전문적인 기술 훈련을 받지 못한 프롤레타리아도 아니었다. 이들은 수공업의 장인과 직인들, 사무원, 소상점주와 소매상인들로서, 말하자면 생계비의 앙등과 정치 위기로 똑같이 격앙되어 있던 소사업주와 임금 노동자들의 집합체였다.
이렇듯 상퀼로트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또한 ‘부르주아’, 금리 생활자, 자유 전문 직업인들도 봉기에 소규모로 참여했다. 바스티유 함락, 샹드마르스 사건(1791년 7월 17일), 튈르리 궁 공격, 혁명력 3년 프레리알에 폭발한 봉기 등이 그러했다. 여성들은 베르사유를 향한 행진, 1792~1793년에 일어난 식량 폭동과 약탈, 프레리알의 봉기 등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 744, 745쪽(부록1·혁명적 군중)

 


혁명이란 무엇인가?


알베르 소불은 《프랑스혁명사》에서 혁명의 개념을 명확히 정립하고, 이를 통해 프랑스혁명의 본질적인 특성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혁명이란 기존 국가 기구의 파괴뿐만 아니라 국가 기구를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와 정치 구조의 근본적인 변모를 뜻한다. 즉, 프랑스혁명의 목표는 구질서의 개선과 악폐의 완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권과 봉건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설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국민들이 겪었던 모순적인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혁명의 과정에서 옛 사회적 관계는 특권계급과 민중계급 간에 일어난 계급투쟁을 거치며 파괴되었고, 혁명 이후에는 그 이전의 절대왕권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민주주의와 같은 제도가 힘을 얻었다. 소불은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사회 세력이 도시의 민중층과 농촌의 농민층의 지원과 견제를 받으면서 어떻게 혁명을 통해 근대 사회와 근대 국가를 빚어냈는지를 보여준다.

 

혁명, 그것은 ‘위로부터’ 강제될 수 없다. ‘개혁’이 ‘위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 강제되는 것이다. 개혁은 사회의 기본 구조를 흔들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적인 사회 범주들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기존의 구조를 보듬는다. 개혁은 자신이 강화하려는 기존 사회의 틀 안에서 존재 이유가 뚜렷해진다. 또한 개혁은 시간적으로 길게 펼쳐진 혁명이 아니며, 개혁과 혁명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내용을 통해 구별된다. 개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여기서 문제는 동일한 결과를 이끄는 더 빠른 길이냐 아니면 더 느린 길이냐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창설이냐 아니면 구사회의 피상적인 수정이냐 사이에서 목표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 776쪽(부록 2·혁명이란 무엇인가?)

 

프랑스대혁명은 장 조레스의 표현을 따르면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명예 혁명’처럼 “좁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보수적인” 혁명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민주적인” 혁명이었다. 대혁명이 이러한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봉건제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 특권에 대한 증오에 이끌려 기아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선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혁명의 기본적인 과업 가운데 하나는 봉건제를 파괴하고 농민과 토지를 해방하는 일이었다. 구체제 말기의 총체적인 경제 위기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구(舊) 사회의 구조와 모순이 혁명의 이러한 특징을 설명해준다. 프랑스혁명은 진정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 특히 농민의 지지를 받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 132, 133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본문 내용 미리보기


 

‘전 인민에게 권력을’ - 루소 철학의 혁명성

평민의 영혼을 지닌 루소는 세기의 흐름에 맞섰다. <만약 과학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이바지했다면>(1750)이라는 첫 번째 논문에서, 그는 당대의 문명을 비판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을 변호하였다. “사치는 우리의 도시에서 백 명의 빈민을 먹여 살리나, 사실상 우리의 농촌에서는 십만 명을 죽게 한다.” 두 번째 논문에서(《인간불평등기원론》) 그는 소유권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에서는 인민주권론을 개진하였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가 권력을 각각 특권계급과 상층 부르주아지에 국한했던 반면에, 루소는 미천한 자들을 해방하고 전 인민에게 권력을 부여하였다. 루소는 개인적 소유권의 남용을 억제하고 상속에 관한 입법과 누진세를 통하여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국가에 부여하였다. 정치적인 영역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영역에서 평등을 촉구하는 이러한 주장은 18세기에는 새로운 것이었다. - 82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식비 비중 88퍼센트, 민중을 강타하다

18세기에 도시 민중계급의 생활 여건은 악화되었다. 물가 상승과 더불어 도시 인구의 증가로 생계비와 임금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임금 생활자 계층의 빈곤화 경향마저 나타났다. …… 서민 생계의 본질적인 문제는 임금과 구매력에 있었다. 물가 상승의 압력은 인구의 여러 계층에서 생계비 구성에 따라 불균등하게 나타났다. 곡물 가격 상승이 가장 심했는데, 특히 하위 계층에서 인구가 증가했고 생계비에서 빵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자연히 민중층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
비극적인 결과를 야기한 것은 계절적인 가격 변동이었다. 1789년 직전 전반적인 물가 앙등 와중에 식비 지출은 이미 민중층 가계의 58퍼센트를 차지했으며, 1789년에는 88퍼센트까지 치솟았다. 식비 이외의 가처분 소득은 겨우 12퍼센트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물가 폭등은 여유층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빈민층을 강타했다. - 61, 62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본질적 위기는 농민층 몰락

민중의 근본적인 요구는 여전히 빵이었다. 1788~1789년에 인민대중이 정치적으로 극히 날카로워진 것도 그들의 생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경제 위기의 심각성 때문이었다. 1789년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어난 폭동은 빈곤이 원인이었고, 그 폭동의 첫 번째 효과도 빵 가격 인하로 나타났다. 구체제 프랑스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농업 위기였던 것이다. 평작이나 흉작이 계속되면 예외 없이 농업 위기가 나타났다. 그러면 곡물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하였고, 곡물을 사 먹어야 하는 대다수 영세농들의 구매력은 감소하였다. 이런 식으로 농업 위기는 공업 생산으로 파급되었다. 농업 위기는 18세기 전체를 통틀어 1788년에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다. 그해 겨울, 기근이 나타났고 실업으로 말미암은 구걸 행각이 급증하였다. 이 굶주린 실업자들이 혁명 군중의 한 축을 이루었다. - 64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최초의 혁명적 봉기는 어떻게 일어났나?

빈곤과 집단 심성으로부터 ‘소요’와 반란이 터져 나왔다. 1789년 4월 28일, 파리에서 벽지 제조업자인 장바티스트 레베용과 초석 제조업자인 프랑수아 앙리오에 반대해 최초의 폭동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선거인회에서 민중의 빈곤에 대하여 파렴치한 발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레베용이 노동자는 하루에 15수면 아주 넉넉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4월 27일에 시위가 있었으며, 28일에는 두 제조업자의 집이 약탈당하였다. 경찰국장이 군대를 투입하자 폭도들은 저항했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최초의 혁명적 봉기는 분명히 경제사회적인 동기를 지녔지 정치적 소요는 아니었다. 인민대중은 정치적 사태에는 분명한 견해가 없었다. 그들이 행동으로 나선 까닭은 경제적·사회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의 소요는 권력을 위태롭게 하는 정치적 결과를 초래하게 마련이었다. - 65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프랑스 전역의 반란 - ‘도시 혁명’

지방은 특권 신분을 향한 제3신분의 투쟁을 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눈초리로 주시했다. 네케르의 파면 소식은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바스티유 함락 소식은 파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7월 16일부터 19일 사이에 전해졌다. 이 소식은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7월 초부터 몇몇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도시 혁명’은 실제로는 7월 초에 루앙에서처럼 식량 부족 때문에 발생해, 오슈나 부르주에서처럼 8월까지 근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디종에서는 네케르의 파면 소식이, 몽토방에서는 바스티유 함락 소식이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
도시 혁명의 이러한 양상은 어찌되었든 결과가 어디에서나 동일했다. 왕권은 소멸했고, 중앙 집권화는 무너졌으며, 거의 모든 지사들이 자리를 포기했고, 세금 징수는 중단되었다. 당시의 표현을 따르면, “국왕, 고등법원, 군대, 경찰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시 자치체가 구 권력을 이어받았다. 절대주의가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지방의 자율성이 자유롭게 작동하게 되었으며, 자치체의 생명력이 다시 풍성해졌다. 프랑스가 자치 공동체화한 것이다. - 169~171쪽(1부·국민, 국왕, 법)

 

1789년의 인권선언, ‘구체제의 사망 증서’

(1789년) 8월 1일, 의회는 토의를 재개했다. 인권선언의 초안을 작성할 필요성을 둘러싸고 대표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바로 이 점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졌다. 심지어 몇몇 발언자는 선언의 시의적절함 자체를 문제 삼았다. 피에르빅토르 말루에같이 무질서에 놀란 온건파 인사는 권리선언을 쓸데없거나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레구아르 신부 같은 이들은 인권선언에 의무 선언을 덧붙이기를 희망했다. 결국 4일 오전, 의회는 헌법의 앞머리에 권리선언을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토론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 1789년 8월 26일, 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인권선언은 특권 사회와 군주제의 폐단에 대한 암묵적인 유죄 선고로서 ‘구체제의 사망 증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권선언은 계몽사상가들의 교리에서 영감을 받아 부르주아지의 이상을 표현했고,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토대를 놓았다. - 179, 180쪽(1부·국민, 국왕, 법)

 

혁명적 군중, ‘상퀼로트’는 누구인가?

혁명 당시에 ‘상퀼로트’로 불렸던 이들은, 바로 혁명적 군중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였던 이러한 오래된 형태의 민중적 범주였다. …… 1793년 4월 10일에 페티옹이 국민공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퀼로트를 말할 때, 우리는 귀족과 특권파를 제외한 모든 시민들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상퀼로트라고 부른다.”
상퀼로트는 행동함으로써 특권계급, 상업, 유복함은 아니더라도 부유함 등에 대한 적대를 통해 스스로를 규정했다. …… 반혁명적인 노동자는 좋은 상퀼로트일 수 없었다. 애국파 부르주아는 기꺼이 상퀼로트의 자격을 갖는다. 사회적 차원은 정치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명확해진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었다. 여기서 핵심은 말뿐인 애국주의나 정신의 단순한 성향이 아니라, 정치적 태도였다. 상퀼로트는 혁명기에 일어난 모든 위대한 사건에 가담했다. - 747쪽(부록1·혁명적 군중)

 

혁명정부와 상퀼로트의 대결, “혁명은 얼어붙었다.”

비록 긴급한 위험에 직면한 혁명정부가 상퀼로트와 동맹을 맺는 데 동의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몇 가지 양보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상퀼로트적인 민주주의의 사회적 목표나 정치적 방법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정부의 양 위원회에게는 민중 조직을 통제하고 그 조직을 부르주아 혁명의 자코뱅적인 틀 속으로 통합하는 것이, 대불동맹이나 반혁명에 대한 투쟁과 양 위원회가 지닌 정치적 개념에 비추어 정당한 일이었다. 따라서 코르들리에파의 반대가 이러한 평형 상태를 위협하자, 혁명정부는 탄압 조치로 응수했다. 그러나 상퀼로트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대변해주고 지지를 받았던 <페르 뒤셴>과 코르들리에파가 제거되는 것을 목도하고는 혁명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혁명정부가 당통도 제거했지만 헛일이었다. 이러한 중대 재판 사건에 뒤이은 탄압 조치는,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투사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구의 정치 활동을 마비시켰다. 이제 혁명정부 당국과 구의 상퀼로트 사이에 직접적이고 우애 있는 접촉은 단절되었다. 곧이어 생쥐스트는 “혁명은 얼어붙었다.”고 썼다. - 440, 441쪽(2부·자유의 전제)

 


지은이 ․ 옮긴이


 

알베르 소불(Albert Soboul)
프랑스의 역사학자. 1914년 알제리의 프랑스 출신 소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6년 소르본대학을 졸업하였다. 몽펠리에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42년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일로 비시 정부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후 프랑스 공산당 지하 활동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50~1953년까지 국립학술연구원(CNRS)에서 일했으며, 1958년 <혁명력 2년의 파리 상퀼로트들>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2년 뒤 클레르몽페랑대학의 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1967년 프랑스혁명 연구의 중심인 소르본대학에 프랑스혁명사 강좌 주임 교수가 되었고, 이후 교육자이자 역사가로서 프랑스혁명 연구에 매진했다. 《자유의 원년, 1789년》, 《문명과 프랑스 혁명》 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정통파 혁명사학자로서 명성을 안겨준 《프랑스혁명사》 수정 작업에 착수해 1982년 죽음 직후에 유작으로 출간했다.

 

최갑수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생시몽의 사회사상>(1991년)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프랑스혁명사, 서양근대사, 프랑스사, 서양사상사 등을 강의한다. 논문으로는 <1789년의 ‘인권선언’과 혁명기의 담론> 등 50여 편, 지은 책으로는 《서양사강의》,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프랑스 구체제의 권력구조와 사회》, 《프랑스의 열정: 공화국과 공화주의》, 《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이상 공저) 등이 있으며, 《프랑스대혁명사》, 《왕정의 몰락과 프랑스혁명》, 《프랑스의 역사》, 《1789년의 대공포》, 《파리의 풍경》(6권, 공역) 등을 옮겼다. 한국서양사학회 회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세계역사학대회 프랑스혁명사분과 학술이사 등의 학술 활동 이외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전국교수노조’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차 례


 

개정판 머리말(클로드 마조리크)
머리말

 

 서론부 _ 구체제의 위기
  1장 사회의 위기
  2장 제도의 위기
  3장 부르주아 혁명의 서장 : 특권계급의 반란

 1부 _ 국민, 국왕, 법 -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1789~1792년)
  1장 부르주아 혁명과 구체제의 와해
  2장 제헌의회 : 타협의 실패
  3장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와 프랑스의 재건
  4장 제헌의회와 국왕의 탈주
  5장 입법의회 : 전쟁과 왕위의 전복

 2부 _ ‘자유의 전제’ - 혁명정부와 민중 운동(1792~1795년)
  1장 입법의회의 종언 : 혁명의 약진과 국가 방위
  2장 지롱드파의 국민공회 :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파산
  3장 산악파의 국민공회 : 민중 운동과 공공 안전의 독재
  4장 승리와 혁명정부의 몰락
  5장 테르미도르파의 국민공회 : 부르주아 반동과 민중 운동의 종언

 3부 _ ‘유산자가 지배하는 나라’ - 부르주아 공화국과 사회의 공고화(1795~1799년)
  1장 테르미도르파 국민공회의 종언 : 1795년의 여러 조약과 혁명력 3년의 헌법
  2장 제1차 총재정부 : 자유주의적 안정화의 실패
  3장 제2차 총재정부 : 부르주아 공화국의 종언

 결론부 _ 혁명과 현대 프랑스
  새로운 사회
  부르주아 국가
  국민적 통합과 권리의 평등
  혁명의 유산

 

부록1 _ 혁명적 군중 : 집단적 폭력과 사회적 관계
부록2 _ 혁명이란 무엇인가?
역자 후기
프랑스혁명 연표
찾아보기


이곳에서 보도자료를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프랑스혁명사(보도자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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