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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인문학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 책 소개

by 교양인 2017. 7. 18.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보도자료.hwp

이곳에서 보도 자료를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는 총체적 저작!
삶과 죽음을 거듭하는 민주주의의 전 역사를 담은 장대한 파노라마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은 10여 년에 걸친 철저한 조사와 연구의 산물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정치학자 존 킨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제도가 서구의 전통이라는 통설에 맞서 고대 시리아-메소포타미아부터 라틴아메리카와 인도, 아프리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역사를 시간적․공간적으로 재구성한다. ‘대의 민주주의’ 시대에서 ‘파수꾼 민주주의’ 시대로 전환을 선언하는 이 기념비적 저술은 민주주의가 지닌 강력하고 경이로운 힘을 보여준다. 2009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브라질, 포르투갈, 일본, 중국에서 출간되었다.

 

 

역사와 정치 이론이 하나로 어우러진, 보기 드문 민주주의 통사


이 책은 민주주의에 관해 빠뜨려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하는가? 21세기 들어와 민주주의가 생명을 다했다는 불길한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적 선거로 선출한 민중의 대표가 자의적인 통치로 민주주의의 이상을 배반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태생적 결함 때문인가? 민주주의는 정말 세계 모든 지역에 적용 가능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체제인가? 민주주의에 과연 미래가 있는가? 민주주의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의 ‘민회’로 대표되는 회의체 민주주의부터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대의제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발명한 다양한 민주적 정치 제도의 흥망성쇠를 마치 현장에서 목격하듯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책의 드넓은 시야에 동참함으로써 민주정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지점과 원인을 확인할 수 있고, 현재 민주주의가 처한 현실을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논할 때 반드시 지참해야 할 텍스트가 될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불평등한 체제에 맞서 삶을 바쳐 투쟁한 사람들, 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향해 한 걸음씩 비틀거리며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특정한 정치 체제나 추상적 이념으로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민주주의에 눈뜨게 해준다. “이 책은 지금은 잊힌 인물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낸다. 이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클레이스테네스, 프랑스 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 인도 민주주의의 길을 개척한 자와할랄 네루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상과 언어, 제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숨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세계 최초로 비밀투표를 도입한 선거 관리 전문가 부스비, 흑인 노예와 여성의 해방을 역설했던 앤젤리나 그림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을 이끈 시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민주주의는 정치가나 정치학자, 역사가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파수꾼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정당과 정치인 중심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한계에 이르렀으며, 권력 감시자로서 시민이 중심에 서는 ‘파수꾼 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적 형태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파수꾼 민주주의란 한 나라의 정부나 국제기구, 시민 사회 조직을 막론하고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조직과 사람들에 대해 공적인 감시와 통제를 가함으로써 권력 집중을 방지하려는 새로운 민주주의 실천이다. 노동 중재 재판소, 시민 의회, 공익 소송 같은 파수꾼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다양한 감시 장치들은 대의 정부와 정치인들을 한층 더 겸손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민주주의는 겸손한 자들의, 겸손한 자들에 의한, 겸손한 자들을 위한 통치”이며, 이 점에서 파수꾼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나타난 가장 발달한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이 책은 파수꾼 민주주의가 우리를 낙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무책임한 선동 정치의 확산, 전 지구적 패권 세력의 경제적․군사적 개입은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삶과 죽음을 거듭했지만 민주주의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번영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방대한 영토를 조감도처럼 그려낸 지성의 파노라마”

 

민주주의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전체 역사를 다룬 무게 있는 통사를 갖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통치 제도임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공백이다. 존 킨은 여태까지의 민주주의 연구가 제도․형태․행위에만 치중하여 역사적 차원을 소홀히 여겼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어떤 역사적 문맥에서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 사상과 실천이 요청되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한다.
민주주의는 고대의 회의체 민주주의에서 비롯되었다가 대의 민주주의로 발전하면서 활짝 개화했다. 그러나 대의 민주주의와 선거 민주주의만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순 없다. 참여적 심층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등이 논의되어 온 까닭이다. 그러나 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서 진화해 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파수꾼 민주주의(monitory democracy)’라 칭하면서 그것의 함의를 추적한다. 촛불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조기 대선을 치른 한국 시민들에게 권력의 책무성을 공적으로 감시하는 파수꾼 민주주의 사상은 신선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원래 시민 사회 연구로 출발한 학자답게 시민 사회와 자발적 결사체가 민주주의에 주는 의미를 킨만큼 능란하게 분석하는 이도 드물다.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은 역사와 정치 이론을 교직하여 솔기 없이 엮어낸 일급 저작이자, 민주주의의 방대한 영토를 조감도처럼 그려낸 지성의 파노라마다. _ 조효제(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영국의 경제 전문지 <더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 기관인 ‘더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2016년도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세계 167개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분석해 발표했다. 10점을 척도로 하고 ‘선거 과정과 다양성’, ‘시민의 자유’ 같은 다섯 가지 평가 기준에 따라 ‘온전한 민주주의’ ‘불완전한 민주주의’ ‘혼형 민주주의’ ‘독재주의’ 등으로 분류한 이 연구에서 한국은 7.92점을 받아 ‘불완전한 민주주의’로 꼽혔다(인터넷 <한겨레> 2017년 2월 24일자 참조). 한편, 2017년 6월 28일 한국정당학회가 개최한 학술 행사(‘6․29 민주화 선언과 한국 민주주의’)에서는 한국의 모든 세대가 한국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전국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서 ‘한국 민주주의 성숙도’를 묻는 질문에 62.6%가 불만족스럽다는 의견을 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와 조사들을 보면 ‘온전한 민주주의’, ‘성숙한 민주주의’란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완결된 형태가 있다는 뜻인가? 이런 의문은 곧 ‘민주주의는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이상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여러 의문과 논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민주주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길어 올린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논란들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해준다.

 

 

의사 결정 방식이자 삶의 방식으로서 민주주의 
이 책은 민주주의를 의사 결정 방식이자 삶의 방식으로 폭넓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우리가 어떤 초월적 존재나 남다른 능력을 지닌 개인, 불변의 진리 같은 것에 매달려 살아가는 객체가 아니라 세계의 주체로서 행동할 것을 결심한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에게 신이라든가 자연이라든가 혹은 이런저런 우월한 자질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권을 차지하는 통치자들이 제시하는 거짓을 꿰뚫어볼 것을 요구한다. 거대한 거짓 믿음이 뒷받침하는 권력으로 이루어진 왕좌에는 아무도 앉지 못한다고 민주주의는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자치(自治)이며, 인민의 합법적 통치이고, 일을 결정하는 인민의 주권적 힘이 이제 더는 상상의 신들과 전통 혹은 전지전능한 독재자, 혹은 그저 특별한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양도되지 않도록 하며, 또한 별다른 생각 없는 무관심이라는 일상의 습관에 맡겨져서 나에게 중요한 일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1064쪽)

 

 

권력을 다루고 길들이는 방법으로서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과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상인가? 이 책에 따르면, 탄생의 순간부터 민주주의는 “겸손한 자들의, 겸손한 자들을 위한, 겸손한 자들에 의한 통치”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돈 많고 힘 있는 자들의 오만과 편견으로부터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힘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 그리하여 약한 자들도 다양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이상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겸손 위에서 번영한다. 겸손은 얌전하고 순한 성격 혹은 굴종과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되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덕이며 오만한 자존심의 해독제이다. 이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능력이다. 겸손한 사람은 환상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 겸손은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을 향한 오만한 허기가 아니다. 따라서 겸손은 타인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을 꺼린다. 폭력에 물든 이 오만한 세상에서 겸손은 사람을 담대하게 만들어준다. 굴복하지 않으면서 겸손은 개개인에게 행동을 통해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준다. 겸손은 오만을 싫어한다. 겸손은 좀 더 평등하고 관대한 — 그리고 덜 폭력적인 —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1065~1066쪽)

 

이상적으로 생각할 때 민주적 제도에는 — 전반적으로 보아 이제까지 가장 발달한 민주적 제도의 사례는 파수꾼 민주주의이다. — ‘지배’라는 활동이 없어도 된다. 여기서 ‘지배’란 대항 수단이 거의 없거나 혹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위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민주적 상황에서는 누구도 타인을 지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통치하는 자가 항상 공적인 견제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푸트 소인족 1천 명이 감시의 밧줄로 통치하는 자를 묶은 것과 같다. 민주주의 체제는 사람들이 정치 권력을 존중하고 칭송할 수 있도록, 또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예의와 존경을 표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준다. (1067쪽)

 

 

민주주의는 분리와 분열 위에 번영한다

파수꾼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시민 사회는 정부로부터, 대표자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사람들로부터, 행정부는 입법부로부터, …… 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법률가는 의뢰인으로부터, 의사는 환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도 시민 사회도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분리는 권력의 집중으로부터 시민들의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고압적인 태도를 제어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사회의 단일화와 정치적 일치 요구에 저항한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잠재적인) 무력함을 항상 상기시키는 것이다. 분리와 이탈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는 밀고 당김이 벌어지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항상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는 것이다. (1071쪽)

 

 

행위이자 과정으로서 민주주의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상, 가치, 제도, 언어가 결코 불변하는 진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민주주의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이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성 시민들로 이루어진 회의체에 의한 자치와 동의어가 아니며, 또한 다수의 의지에 지휘를 받는 정당 중심의 정부와 같은 의미도 아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모든 곳의 권력이 견제를 받고 균형을 유지하며 그에 따라 그 누구도 피치자 혹은 그 피치자의 대표자 동의 없이 통치할 권리가 없는 삶의 방식과 정부의 형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순수하거나 완전한 민주주의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그 권력의 위험성에 대한 민주주의의 의심은 일견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을 내포한다.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맹수들을 민주주의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민주주의는 ‘순수’하거나 ‘진정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 체제는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달을 때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민주주의는 불완전성 위에서 번영한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어긋나는 현실 때문에) 위선과 빈약한 성과를 이유로 들어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실 민주주의가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움직인다. 민주주의는 완료된 동작이 아니고, 여러 행동이 모여서 하나의 세트를 이루면서 리허설을 계속하는 것이다. (1077, 1079쪽)

 

 

 

 

지금 왜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가?

 

 

전 세계적으로 선거 민주주의의 실패와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를 걱정하고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급속히 진행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민주주의 후퇴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은 이 문제에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이 책은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주의의 오랜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여러 민주주의 체제의 기원과 성장, 몰락에 이르는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민주주의의 현재를 더 새롭고 다층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아는 것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열쇠이다.

 

과거 사실을 잘 알게 되면 현재나 미래에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알게 된다. 혹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를 정치적 질병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나 그 반대로 민주주의가 사회적 긴장을 치유하고 경제 성장을 촉발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주주의에 헛된 칭송의 화관을 씌우려는 사람의 등에 작은 핀을 찔러 그런 행동을 삼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의 바탕에 깔린 또 하나의 생각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붙잡고 힘들게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새로운 측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의 전제는 단순 명료하다. 즉 과거에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현재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090쪽)

 

이 책은 서구 중심으로 쓰인 대부분의 민주주의 역사서들과 달리, 수천 년에 걸쳐 세계 곳곳에서 탄생한 민주적 이상과 제도, 언어의 역사를 폭넓게 다룸으로써 민주주의의 역사 자체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살펴보면서 저자는 ‘의회’, ‘비밀투표’, ‘(고대 그리스의 민회와 같은) 공적인 회의체를 통한 통치’, ‘배심 재판’ 같은 오래된 제도들의 기원에 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민주주의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다양한 환경에서 번성할 수 있으며 반(反)민주적인 행동과 생각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통설이 우리의 편견이거나 오해였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처음 탄생한 곳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였고 민주주의는 서구의 발명품이자 전통이라는 믿음, 민주주의 체제의 외형은 바뀌어도 민주주의의 이상은 불변한다는 생각, 민주주의가 한 나라 안에 자리를 잡으려면 경제가 충분히 뒷받침되어야 하고 공통의 문화로 묶인 ‘국민(민중)’이 존재해야 한다는 통념이 그런 것들이다.

 

 

 

<본문 들여다보기>

 

 

회의체 민주주의 시대
Assembly Democracy

 

 

이 책의 핵심은 민주주의의 정신과 제도,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서로 조금씩 겹치는 세 단계의 역사를 거쳐 발전해 왔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세 역사 단계를 각각 ‘회의체 민주주의 시대’, ‘대의제 민주주의 시대’, ‘파수꾼 민주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모두 각 시대를 특징짓는 통치 유형에 상응하는 명칭이다.
첫 번째 역사 단계인 ‘회의체 민주주의 시대’는 “대략 기원전 2500년에 지리적으로 오늘날 ‘중동’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단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쳐 기원후 950년경 이슬람 세계까지를 포함한다. 이 역사 단계는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 그리고 그 외 몇몇 도서 지역에 ‘팅’, ‘뢱팅’, ‘알팅’이라는 이름의 지방 회의체가 확산되면서 끝이 난다.

 

 

아테네 민주주의
이 책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고대 아테네가 “서양 문명의 발상지이며 민주주의의 요람”이라는 우리의 믿음이 19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일종의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영광스러운 발명품은 아테네 사람들의 용기와 지혜와 올바른 판단력과 불타는 투쟁 의지 덕분에 탄생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것을 ‘데모크라티아’라고 불렀으며, 그 의미를 평등한 자들이 스스로 통치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했다는 신화가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했으며, 다른 도시국가에 비해 많은 기록을 남겨놓았다. 20세기에 이루어진 대규모 고고학 발굴 작업에서 아테네가 남긴 각종 조약, 법률, 투표용 표찰 따위가 발굴되면서 민주주의 창립 신화에 근거가 될 ‘사실들’이 확보되었다. 또한 《그리스의 역사》(전 12권)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을 열렬히 옹호했던 조지 그로트 같은 19세기 유럽의 몇몇 역사가도 한몫을 했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주의’ 체제였나? 
아테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함께 공적 사안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민회’와 참주의 등장을 방지하기 위한 ‘도편 추방제’ 따위 민주적 제도 덕분에 후대에 ‘직접 민주주의’의 모범으로서 오랫동안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아테네 민주정이 주권을 지닌 ‘데모스’ 즉 민중의 직접 통치에 기반한 체제였다는 이야기가 허구임을 보여준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아레오파고스’라는 이름으로 부른 기구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권위 있는 이 법정은 그 뿌리를 민주정 이전 시대에 두고 있는데, 아테네에 민주정이 지속된 250년 동안에도 이 법정은 상당한 권한이 있었으며, 이따금씩 이 법정의 권한은 민중이 항상 통치한다는 민회의 원칙을 마치 도끼날처럼 치고 들어왔다. …… 시민 전체가 스스로 통치하며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데 직접 참여한다는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또 다른 요인은 아테네의 민회가 일정한 필요에 따라 특정한 시민에게 많은 기능을 위임했다는 사실이다. - <1장 아테네>․99, 100쪽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오만’
민주주의는 “무책임한 권력의 집중에 따라 언제나 발생하게 되는 어리석음과 오만에 대항하여 인류가 발명한 최선의 무기”이다. 반대로 타인을 통제하는 권력에 빠져 ‘평등한 사람들 간의 권력 공유’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저버리는 순간, 민주정은 생명력을 잃게 된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가 권력의 오만에 물들어 자멸의 길을 걸었다. 아테네 민주정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기원전 5세기 동안 아테네는 계속해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기원전 450년이 될 무렵이면 무려 160개에 이르는 도시국가를 제국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군사화 과정에서 아테네 내부에서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제한받기 시작했고 군사 지휘관들이 명성과 권력을 쥐게 되었다. 외부에서는 아테네에 도전장을 내미는 세력이 늘어났다.

 

아테네 민주정이 몰락하기까지는 확실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좌절이 거듭되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승리도 있었기에 좌절의 의미는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아테네 민주정이 혹시라도 제국을 향한 욕망 추구를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국가들과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타협을 하면서 동반자적 연합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여하튼 아테네가 이렇게 제국 건설을 추진하면서 정치 생활이 점차 군사화되었고, 따라서 아테네는 이제 아테네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되고 말았다. 제국의 안으로 들어와 있는 국가들이나 그 밖에 있는 국가들이나 아테네를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군사화는 아테네 내부적으로도 해로운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 <1장 아테네>․136쪽

 

 

오리엔트 민주주의 – 아테네 이전의 민주주의
그러나 저자는 ‘민주주의’에 관련된 단어와 민주주의적 통치(‘회의체를 통한 평등한 자들의 자치’ 혹은 ‘민중의 지배’)를 아테네의 발명품이라고 보는 견해와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을 소개한다. “그리스인의 도시국가 가운데 민주정이 더 오래 유지되고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한 곳도 있었”으며, “아테네보다 한 세대 앞서 민주정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 식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동방(오리엔트)’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데모크라티아’라는) 단어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리스 고전 시대보다 700년에서 1000년 정도 앞선 미케네 문명 시기의 ‘선형문자 B’ 기록물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미케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했던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1200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 회의체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등불이 처음 밝혀진 곳은 ‘오리엔트(동방)’ 지역이었다. 이때 ‘오리엔트’는 현재의 지리적 명칭으로 보자면 시리아, 이라크, 이란 지역을 가리킨다. - <프롤로그>․17쪽

 

 

이슬람의 민주주의 전통 – 아테네 이후의 민주주의
저자는 아테네 이후 민주주의가 완전히 소멸했다가 기원후 1100년경에 에스파냐에서 갑자기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기원전 260년에 아테네 민주정이 마케도니아 제국에 의해 무너진 뒤 그리스 지역의 민주주의가 비극적인 몰락을 맞았으며 민중의 지배는 이후 1천 년 동안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식의 설명은 초기 이슬람 세계의 민주적 전통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 나타난 자치적 회의체의 전통은 초기 이슬람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그런 회의체의 예로는 ‘와크프’와 ‘모스크’가 있었으며, 경제 분야에는 통치자로부터 법적으로 독립된 ‘샤리카’라는 일종의 공동 경영 조직이 있었다.

 

그리스 민주주의 시대의 아고라와 프닉스를 합쳐놓은 것처럼, 모스크는 지역 공동체의 회의체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공 장소 구실을 했다. 모스크는 회의체 민주주의의 정신을 전하는 강력한 매개체였다. 이곳에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다.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가 모두 동등하게 환영받는 곳이었다. …… 다른 문화 전통과 언어를 지녔다는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입장 금지 조치를 내리는 행동은 비판을 받았다. - <2장 오리엔트 민주주의>․221~222쪽

 

 

 

 

대의제 민주주의 시대
Representative Democracy

 

 

기원후 10세기경에 민주주의는 서서히 두 번째 역사 단계로 들어섰다. 저자는 기원후 1000년경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문명에 대항해 일어났던 군사적 충돌에서 이 역사 단계가 시작되었으며, 그 여파로 12세기에 에스파냐에서 ‘의회’ 제도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영국을 의회의 탄생지라고 부르는 것은 또 다른 편견이라 지적한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말은 18세기에 프랑스와 영국, 새롭게 탄생한 미합중국에서 헌법 제정자들이나 영향력 있는 정치 저술가들이 민중의 동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통치 형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 단계 동안 민주주의는 곧 대의 민주주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두 번째 역사 단계는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민주적 삶의 방식이 거의 파멸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게 후퇴한 상황에서 끝이 났다. “1941년에 지구상에는 (실질적인) 민주 국가가 11개에 불과했다.”

 

 

대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의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아주 참신한 사고방식이었다. 이 새로운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최소 두 명 이상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하여 진정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고, 투표자로서 자유롭게 대리인을 뽑을 수 있다. 그리고 대리인들은 투표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활동한다. 이 대리인들은 다른 사
람들을 대신하여 의사 결정을 내림으로써 사람들을 ‘대의’한다. ‘대의’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누가 누구를 대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만약 대리인들이 자신들이 대의해야 할 사람들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의문을 두고 많은 잉크와 피가 흘렀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두 번째 역사 단계 동안 줄곧 사람들은 대리인들이 통치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라는 믿음을 공유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 정당 정치와 노예제 반대 운동
1776년 독립 혁명 이후 미국은 대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미국에서 발명된 여러 민주적 정치 제도들을 목격한 많은 관찰자들은 “19세기야말로 민주주의의 세기이며 미국은 그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동력”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발명품에는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당 간 경쟁, 전국 규모의 전당 대회, 활기차게 진행되는 대중 선거,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시민 사회, 많은 여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공적으로 목소리를 낸 반노예제 운동 등이 있었다.

 

(19세기 전반 미국에서는) 각종 토론을 진행하고 의결 사항을 통과시키고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열리는 공공 집회가 젊은 공화국 전체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 선거권 확대 요구가 커짐에 따라 결국 1824년이 되면 공화국의 모든 주가 사실상 백인 성인 남성 전원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상황이 되었다.(영국에서는 1867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다.) 이제 미국은 과거에 왕정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정파에 품었던 공포심을 완전히 떨쳐버렸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상시적으로 활동하는 정당과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전업 정치인을 탄생시켰다. - <4장 미국의 민주주의>․412, 413쪽

 

노예제라는 죄악을 쓸어버리자는 호소는 대의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사회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그뿐이 아니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사용한 개념이나 논리, 조직 운용 전술은 다른 분야로 그대로 복제되었으며 때로는 놀라울 정도의 민주적 효과를 낳았다. …… 여성이 해방되어 마땅하다는 주장에는 오래된 뿌리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17세기와 18세기의 프로테스탄티즘 운동과 자연권 교리가 있었다. 하지만 여성을 최초로, 그것도 역사상 전례가 없는 큰 규모로 단결하게 한 것은 1830년대 미국의 노예제 반대 운동이었다. 여성의 이러한 단결은 노예제에 심각한 도전이었을 뿐 아니라,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을 침묵시킨 바탕 위에 세워진 시민 사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 <4장 미국의 민주주의>․438, 439쪽

 

 

라틴아메리카의 ‘카우디요 민주주의’ – 뒤틀린 대의 민주주의
1807년 나폴레옹이 에스파냐를 침공하면서 그 여파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지역에 있던 에스파냐의 식민지들에서 반(反)제국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이 지역에서 일어난 혁명들은 군주제나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헌법(엄격한 권력 분립, 대의 제도, 주기적인 선거 등을 규정하는 헌법)을 갖춘 자유 독립 국가를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대략 1830년까지 이어진 이 지역의 변화는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고 ‘국민’을 대리해 통치한다는 정부가 그 체제를 이용해 ‘국민’을 억압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19세기에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나타난 변형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카우디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카우디요란 19세기 초부터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한 정치․군사 지도자를 가리킨다.)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과두 지배자들은 국민의 지배가 훌륭한 지배임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했다. 하지만 실제로 국민의 지배는 일시적으로만 작동해야 했다. 이는 마치 로마 시대의 축제일이었던 ‘사투르날리아’와 같은 것으로, 이날은 군중 무리가 기성 과두 지배 체제를 상징적으로 타도하는 날이었으며, 군중 무리는 이날이 지나면 한 해 동안 지배 계급에 순종해야 했다. 카우디요들은 권리를 박탈하는 데 세련되고 복잡한 무기를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간접 선거에 의존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주민을 걸러내는 장치였다. …… 혹시라도 여전히 투표 결과가 불안할 때면, 유력 가문들은 부하들에게 투표를 직접 감독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투표용지를 세는 일을 맡기기도 했다. - <라틴아메리카의 카우디요 민주주의>․551쪽

 

 

제국주의의 변방에서 자란 민주주의 – 오스트레일리아의 비밀투표
한편, 이 두 번째 역사 단계에서 대영 제국의 식민지 여러 곳에서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인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 본토에서는 불가능했던 정치적 혁신이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에서 가능했다.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어느 정도 자치를 허용했던 것이 뜻밖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한 예로 오스트레일리아 남부 지역에서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중요한 선거 혁신이 일어났다. 바로 ‘비밀투표’ 제도의 도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식 투표 제도(‘비밀투표’)가 도입되기 전을 보면, 이제 막 대의 민주주의가 떠오르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선거 경쟁이란 대낮부터 친한 사람들끼리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벌이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었다. 선거 운동은 공공 장소에서 상대방을 위협한다든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의사를 전달한다든지, 혹은 귀엣말로 소식을 주고받는 식의 행동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후보자들은 투표 전에 이미 투표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었다. …… 태즈메이니아와 빅토리아에서 시작된 오스트레일리아식 투표는 많은 더러운 속임수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다.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발명품에 자부심을 느꼈으며 이런 자부심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 <유럽의 민주주의>․682, 688쪽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와 전체주의
20세기 전반기에 대의 민주주의 모델은 파국의 위기에 직면했다. 의회제는 대공황 같은 심각한 경제 위기나 전체주의의 유혹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에는 힘이 약했다. 결국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파시즘 지도자들이 대중 매체를 적극 활용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저자는 전체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의 모조품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운동이 되었건 체제가 되었건 상관없이 항상 그 제도, 방식, 감성을 말할 때 프랑스 혁명에 기원을 둔 인민의 거대한 반란에 경의를 표한다. ‘착취당하는 노동 인민의 권리에 대한 볼셰비키 선언’(1918년)과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에 대한 나치의 거창한 이야기는 모두, ‘인민’이 더는 무시될 수 없으며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 반대로 인민의 필요와 욕구가 인정되어야 하며 나아가 세계사적 영향을 끼치는 힘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정서를 구체화하고 있다. …… 전체주의는 대중의, 대중을 위한 통치이자 대중의 지도자들에 의한 통치였다. - <유럽의 민주주의>․738쪽

 

 

 

 

파수꾼 민주주의 시대
Monitory Democracy 

 

 

20세기 전반기에 심각한 후퇴가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사라질 위기에서 다시 살아났다. 민주주의는 아프리카, 아시아, 동유럽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20세기 말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인 정치 언어가 된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신했으며, 20세기를 ‘민주주의의 세기’로 선언하거나(‘프리덤하우스’ 보고서),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프랜시스 후쿠야마)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의 민주주의 시대는 저물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세 번째 역사 단계에 들어섰다고 본다. 저자는 새롭게 떠오른 민주주의의 역사적 형태를 ‘파수꾼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변화하는 민주주의
이 책은 1945년 이후 현재까지 과거 민주주의 세계에는 없었던 주민 참여 예산 제도, 공익 소송, 싱크탱크 같은 약 100종류에 이르는 새로운 권력 감시 장치가 발명된 것에 주목한다.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의회 외적인 장치들은 정부와 시민 사회 구석구석을 파고들었을 뿐 아니라, 영토 국가의 영역을 넘어 국제기구에까지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있다.

 

시민 사회에 대한, 그리고 과거에는 정치와 관계없다고 여겨졌던 것을 공적으로 면밀히 감시하는 문제에 대한 이 강렬한 공공의 관심은 파수꾼 민주주의 시대에 나타난 특이한 현상이다. ……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큰 규모로, 공공 감시의 경향성이 모든 정책 영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동 학대나 아동의 법적 권리, 운동과 식사에 관련된 신체적 습관, 생물 서식지 보호 계획과 (석탄과 핵을 제외한) 대체 에너지 자원 문제에까지 공공의 관심이 향하는 것이다. 나노 기술과 유전자 조작 식품 개발이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에 맞게 공적인 통제를 보장하자는 운동은 위에 언급한 것과 동일한 경향을 띤 또 다른 예이다. - <8장 거대한 변화>․896쪽

 

 

인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
저자는 파수꾼 민주주의와 관련해 특히 인도에 주목한다. 인도는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민주정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민주주의를 보여준다. 1947년에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뒤 인도는 기존 민주주의 체제와 다른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권력을 공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새로운 장치들이 다양하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지방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판차야트’라 불리는 자치 제도, 소수자 집단을 위한 의무적 할당제, 수자원 협의 제도가 그런 것들이다. 즉 인도는 파수꾼 민주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좋은 예이다. 다른 무엇보다 인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통념이 서구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도 시민들의 빈곤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찢어지게 한다. 하지만 수백만의 인도인들은 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려면 우선 경제가 받쳐주어야 한다는, 과거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인들의 견해가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그 대신 인도인들은 거꾸로 민주주의를 ‘통해’ 경제적으로 건강해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도인들은 겸손한 사람들도 이 땅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장 강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적합한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법칙’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프롤로그>․40쪽

 

 

파수꾼 민주주의의 위기
이 책은 이제 태어난 지 70년쯤 된 파수꾼 민주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지구화로 인해 세계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연결된 상황에서 경제 불황, 빈부 격차 증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대두, 테러리즘, 잔혹한 내전, 환경 파괴 같은 문제는 전 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흐름이 지속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민주주의의 몸통으로 칼날처럼 파고들어 깊이 자리 잡은 현상들이 있다. 이런 현상들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없으며 쉬운 해결책도 없다. 미국의 발흥이 그런 현상 가운데 하나다. 역사상 최초로 전 지구적 규모로 작동하는 세계 제일의 군사 제국인 미국은 민주주의의 이름을 내걸고 움직이면서 종종 민주주의를 좋아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 러시아와 중국, 다른 권위주의 국가들과 긴장을 조성한다. 이와 같은 수준의 위험한 현상으로는 파괴적이며 무차별적인 비정규전의 확산, 지구 생물권의 단계적 파괴, 모든 민주 국가가 보유한 살상력을 다 합한 것보다도 더 강한 살상력을 지닌 새로운 무기 체계의 확산 따위가 있다. - <프롤로그>․43쪽

 

 

 

 

추천사와 서평

 

 

“이 책은 보기 드문 성취이며, 존 킨의 평생에 걸친 연구의 정점이다. 지금까지 같은 주제를 다룬 대부분의 저자들과 달리, 존 킨은 전 세계에 걸쳐 민주주의의 기원과 역사를 추적한다. 민주주의의 역사, 현재 민주주의가 처한 딜레마, 앞으로 민주주의의 전망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앞으로 한동안 표준 교재이자 필수적인 텍스트가 될 것이다.” _ 앤서니 기든스․영국의 사회학자, 런던정경대(LSE) 교수 

 

“(폴란드의) 독재 시기 동안, 우리의 저항을 지원하기 위해 존 킨은 ‘에리카 블레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는 조지 오웰의 정신으로 용기와 연대 의식을 보여주었으며, 이 책에서 나는 그때 그 모습을 다시 발견했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_ 아담 미치니크․폴란드의 역사학자, <가제타 비보르차(Gazeta Wyborcza)> 편집장

 

“역사 서술의 걸작이며,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책이다. 긴 생명을 얻을 것이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_ 고(故) 랄프 다렌도르프․독일의 사회학자

 

“존 킨이 쓴 이 놀라운 책은 획기적인 역사적 발견들과 세계를 이해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학자로서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친구들을 옹호하고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강력한 슬로건이다.” _ 매슈 테일러․영국 왕립예술학회(RSA) 회장

 

“진지한 주제를 다룬 묵직한 책이지만 문장은 경쾌하다. 딱 알맞은 때에 우리를 찾아온 민주주의의 전기.” _ <The Guardian>

 

“이 책에서 존 킨이 보여주는 박식함은 그 폭과 깊이 면에서 놀랍기 그지없다. …… 이 책의 여러 강점 중 하나는 민주주의에 관한 편협한 인식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발도상국과 탈식민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유형을 발견한다.” _ <The Times>

 

“고대 수메르까지 민주주의의 뿌리를 추적하고,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가와 개혁가들을 조명한다. …… 풍부한 지식과 정보, 날카로운 통찰, 거침없고 생생한 문체가 이 책을 학자와 시민 모두의 필독서로 만들었다. _ <Publisher’s Weekly>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만큼이나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특별한 책. 이 책은 민주주의 체제가 최근 보여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여전히 매우 좋아하며 한편으로 너무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_ <Social Europe Journal>

 

 

 


지은이·옮긴이

 

 

존 킨(John Keane)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정치학자. 시드니대학과 베를린사회과학원(WZB) 정치학 교수이다. 시민권과 시민 사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으며,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창조적 발상을 담은 여러 저술을 발표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 이전부터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시민 사회’의 수호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서 주목을 받았다. <타임스>는 그를 영국을 이끄는 정치 사상가이자 저술가로 선정했고, 오스트레일리아방송협회(ABC)는 그를 ‘오스트레일리아가 배출한 위대한 지성’이라고 칭했다.

 

양현수 _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장칭》, 《트로츠키》가 있다.

 

 


차 례

 

한국어판 머리말
프롤로그 _ 불길한 달과 작은 꿈

 

1부 회의체 민주주의

1장 아테네
참주 살해자들 / 아고라의 신들 / 데모크라티아 여신 / 민주주의의 영웅들 / 노예제와 민주정 / 시장과 광장 / 민회와 도편 추방제 / 직접 민주주의 / 민주정과 우연성 / 민주주의의 적대자들 / 제국의 오만 / 민주정의 종말

2장 오리엔트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의 재발견 / 아테네 이전의 민주주의 / 에게해의 민주주의 / 고대 동방의 회의체 / 페니키아의 ‘무두트’ / 족장들의 평의회 / 회의를 소집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신 / 시리아-메소포타미아 회의체의 전파 / 이슬람과 회의체 / 모스크, 평등의 공간 / 이슬람교의 변질 / 이슬람 민주주의자 알파라비 / 중동 지역의 ‘협의’ 전통 /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 선출 방식 / 유럽에 끼친 이슬람의 영향

 

2부 대의제 민주주의

3장 대의 민주주의의 탄생
민주주의의 미스터리 / 대의 민주주의 등장 / 의회의 기원, 코르테스 / 코르테스의 확산 / 신분제 의회의 역할 / 초기 의회의 한계 / 자연 환경과 대의제 / 자유의 성역, 도시 / 도시 공화국 / 공화주의와 민중 / 평민들의 반란 / 교회와 민주주의 / 배심원 제도의 기원 / 카노사의 굴욕 / 공의회의 탄생 / 콘스탄츠 공의회 / 종교 개혁의 역설 / 스코틀랜드 칼뱅파의 시민 불복종 / 《아레오파지티카》와 언론의 자유 / 저지대 개신교도의 봉기 / 세금과 네덜란드의 민주주의 / 왕관을 쓴 폴란드 공화정 / 찰스 1세 처형 / 함께 처형된 군주제

4장 미국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두려워한 독립의 아버지들 / 공화 민주주의의 등장 / 토머스 제퍼슨의 평화적 정권 교체 / 잭슨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 / 시민 사회와 기독교 민주주의 / 토크빌의 찬탄과 경고 / 노예제 논란 / 미국의 분열 / 여성 해방과 노예제 폐지 운동 / 노예제 선동가 / 정당 국가 / ‘머신’ 정치 / 인민주의의 등장 / 혁신주의 운동 / 오리건 주의 민주주의 실험 / 위스콘신 아이디어 / 월터 리프먼의 ‘유령 민주주의’ / 결백한 제국? / 원주민 학살 / 영토 늘리기 / ‘위대한 국가’를 향하여

5장 라틴아메리카의 카우디요 민주주의
미국의 개입 /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 자생적 민주주의 / ‘카우디요 민주주의’ 등장 / ‘민주주의자’ 왕 / 이름뿐인 선거 / ‘붉은 로사스’ / 정권 유지 전쟁 /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 / 민주주의 실험실, 우루과이 / 카우디요의 복귀

6장 유럽의 민주주의
민중의 봉기 / 영토 국가와 국민의 탄생 / 유럽의 절대주의 /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 민주주의 수출 전쟁 / 나폴레옹과 교황 / 사회민주주의의 등장 / 러시아 인민주의 운동 / 영국식 민주주의 / 식민주의의 역설 /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개혁 / 오스트레일리아의 선거 혁신 / 유리카 봉기 / 오스트레일리아의 비밀투표 / 최초의 여성 참정권 / 여성 참정권 운동가, 뮤리엘 매터스 / 민족과 민족주의 / 세계대전과 민주주의의 붕괴 /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하여

 

3부 파수꾼 민주주의

7장 인도의 민주주의
인도에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 비서구 민주주의 / 간디와 네루의 민주주의 / 네루의 겸손한 카리스마 / 상처 입은 호랑이 / 인디라 간디와 민주주의의 위기 / 암베드카르의 질문과 예언 / 약자 할당제와 계급 의식 / 판차야트 개혁 / ‘바니안나무’ 민주주의 / 민주주의의 혼란 / 종교 갈등과 민주주의

8장 거대한 변화
민주주의의 지구화 / 라틴아메리카의 민주 회복 / 체코의 벨벳 혁명 / 장미 혁명과 튤립 혁명 / 역사의 종말? / 새뮤얼 헌팅턴의 ‘제3의 물결’ / 민주주의의 돌연변이들 / 파수꾼 민주주의의 등장 / 파수꾼 민주주의와 대의 제도 / 국제 사회의 선거 감시 / 시민 사회의 민주화 / 감시견 조직과 안내견 조직 / 감시받는 정상 회담 / 흑인 민권 운동과 ‘짐 크로 법’ / 파수꾼 민주주의의 지적 토대 / ‘세계 인권 선언’을 만든 사람들 / 미디어 네트워크의 힘 / 바이러스 정치

9장 미래에서 본 민주주의
되돌아보는 현재의 역사 / 정당 정치의 위기 / 미디어 스타 정치인 / 초인 민주주의 경향 / 국경 없는 정치체 / 타오르는 민족주의 / 폭력의 삼각형 / 민주적 평화의 법칙? / 미국의 착각 / 민주주의의 새로운 적들 / 위선자, 몽유병자, 운명론자 / ‘작은 걸음’의 원칙 / 미국과 중국의 미래

10장 민주주의의 민주화
민주주의라는 것 / 겸손한 민주주의 / 민주주의의 참신함 / 지배자 없는 지배 / 권력의 평등, 기회의 평등 /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민주주의

 

에필로그 _ 새로 쓰는 민주주의의 역사

감사의 말 / 주석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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