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_ 김영옥
“이 책은 내게 평화를 허락해주었다.
저자가 선사하는 위로와 안전감 앞에서 무장 해제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리라.
‘페미니스트 지식인’의 글쓰기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_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주름이 늘어날수록 나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본 노년의 시간
대중매체에 보이는 노년은 말 그대로 극과 극이다. 마당 있는 집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미소 짓는 고령의 부부, 생애 처음으로 패션모델이나 유튜버 같은 일에 도전하는 멋진 노년의 모습은 은퇴 후 삶의 희망 편이다. 비쩍 마른 몸으로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노년, 치매나 병에 걸려 요양시설이나 골방에서 고독사 하는 노년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절망 편일 것이다. 초고령화 사회를 대비해 사회적으로 이런저런 노후 대책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계획으로도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고립감과 소외감을 막을 수는 없다. 노년기를 위한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에서 저자는 노인복지나 심리학의 차원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노년을 더 섬세하게, 깊이 들여다본다. 저자에게 노년기는 삶을 정리하고 소멸을 기다리는 차가운 어둠의 시간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또 다른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빛의 시간이다.
성 차별과 연령 차별,
교차하는 차별의 한가운데서 외치는 해방의 젠더 정치학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직접 체험과 시, 소설, 영화, 사진, 무용 공연, 실존 인물 등 다양한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우리 시대 노년의 삶을 성찰하는 특별한 사회문화 비평이다. 이 과정에서 ‘완경’이라는 말로는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갱년기의 의미, 노년에도 계속되는 에로스적 사랑, 배우자나 가족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치매’를 대하는 새로운 시각까지 나이 듦을 둘러싼 온갖 이야기가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유쾌하게 펼쳐진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때로는 아래에서 흥겹게 춤추는 나이 든 여성들의 모습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젠더 관습을 깨부수는 해방의 기운을 느낀다. 어머니를 여읜 상실의 고통을 겪으면서 애도를 통한 연대의 가능성을 깨닫고, 가정과 노인요양시설에서 여성에게 전가되는 돌봄 노동의 문제를 가차 없이 드러낸다. 노년에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그 여정을 준비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나의 인생 이해나 자기 정체성 이해는 2016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렇지 않아도 또래보다 일찍 ‘기우는 몸’을 경험하기 시작한 내게 당시 4개월 정도 세 군데 병원의 상이한 병동에서 보낸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이 되었다. 몸으로,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나이가 들면서 질병과 함께 ‘장애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통증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갖게 되었다.” _ ‘머리말’에서
김영옥은 무시와 공포에 갇혀 있는 ‘상실, 노화, 치매, 죽음…···’을 상투성에서 해방한다. 관조와 타자화가 아닌 깊고 세밀하게 관계 맺는 인식으로 노년과 여성성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체적인 몸의 자리에서 촘촘히 누빈 이야기들은 안티에이징이나 잘 늙는 법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현명한 비관” 속에서 내민 손 잡아주기의 간절함을 감각하게 만든다. 인권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나는 “가슴 설레게 하는 선배”에 자주 목말랐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내 안의 할머니들”은 따라하기가 아닌 창조적인 ‘서로 닮기’를 시도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야기들’로 판을 뒤집으려 한다. 돌봄과 의존이 삶의 근본임을 환기하며 이 가치를 시대 정신으로 실어 나르는 ‘가슴 설레게 하는 선배들’이다. 다양한 독자들이 저마다의 할머니를 만나서 사람들 ‘사이’를 조직하고 ‘서로 응답’하며 함께 춤출 수 있기를 희망한다. _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람을 옹호하라》 저자
김영옥의 글을 읽으며 오래 울었던 어느 아침을 기억한다. 조발성 치매를 주요 증상으로 하는 희귀병을 진단받은 친구의 소식에 온통 흔들릴 때였다. 그 글은 말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삶이 있다, 그것도 삶이다, 삶일 수 있다. 닫히는 가능성의 목록으로만 주로 회자되는 시간을 날 선 지성과 애정 어린 탐구로 마주하여 거기서 다른 가능성의 시간을 길어 올리기. 이런 김영옥의 사유는 두려움을 도닥여주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삶일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공들여 함께 묻기에 자기 기만이나 입발림하는 위로로 퇴색하지 않는다. 앞서 탐험 나간 사람이 수풀을 헤치고 잡초를 밟아 가며 어렵게 낸 작은 길 같은 글들, 이 소중한 발자국들을 같이 찬찬히 들여다보자고 권하고 싶다. 아, 그 아침의 귀한 글도 마침내 여기 묶여 실렸다는 말을 덧붙여 둔다. _ 메이, 번역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저자
다른 사회적 모순과 달리 나이 듦은 불가역적 경험이다. 우리는 나이마다 다른 자신의 몸을 수용하기 어렵고, 타인의 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이 듦에 관한 글들은 큰 공부가 된다. 오랫동안 육체적 통증에 시달려 왔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서 잊었던 내게 이 책은 평화를 허락해주었다. 저자가 선사하는 위로와 안전감 앞에서 무장 해제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리라. 《흰머리 휘날리며》는 당대 점차 사라져 가는 ‘페미니스트 지식인’의 글쓰기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저자의 지성과 성찰은 우리를 돌본다. 오래도록 곁에 있을 책이다. _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는 말은 유행가 가사로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현실은 아니다. 종종 6080 노년들 대상으로 나이 듦 관련 강의를 한다. 그들이 참여자이고 내가 강사지만,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늙고 있는 우리는 각자 경험하는 나이 듦에 대해 같고도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눈다. “마음은 청춘인데…… 넘어지면 이전에는 타박상이었는데 이제는 골절상이라고 하네요. 마음을 계속 청춘으로 유지하는 방법이 없을까요?”라며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나이 들면서 품게 되는 질문들의 이모저모를 다룬다. 답이나 위로보다는 그야말로 질문들이 어디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질문의 허상과 실상은 무엇인지, 누가 질문하고 그러면서 정작 누구를 소외시키는지 등에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
페미니즘은 삶의 모든 국면, 그동안 역사가 구축해 온 지식 체계 전반을 젠더 관점에서 낯설게 보고 새롭게 정초하는 데 힘을 써 왔다. 그러나 그 페미니즘의 대안 세계 안에서도, 늙고 병들고 아프고 돌보며 돌봄받는 이들의 이야기는 변방에 머문다. 예순 넘은 여성이라는 정체성도 다른 정체성들이 그렇듯 여러 층위가 교차하는 맥락의 한가운데서 세워지고 부서지고 또 다시 세워진다. 페미니즘이라는 대안 세계 안에서도 가장 변방에 있는 이 정체성의 당사자들이 어떤 이중 삼중의 대안을 꿈꾸고 살아낼지 궁금하다. _ ‘머리말’에서
백발의 페미니스트가 쓴
여성과 나이 듦, 몸, 기억, 이별, 돌봄에 관한 열네 편의 에세이
페미니스트, 갱년기와 ‘더불어’ 살다
월경(menstruation)과 중지(pause)가 합쳐진 말인 메노포즈(meno-pause)는 문자 그대로 더는 월경을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 그러나 메노포즈의 한국어 용법이 ‘완경’과 ‘갱년기’ 둘 다를 포함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메노포즈는 단순히 ‘월경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 호르몬의 작용에 따른 결과지만, 메노포즈는 신체적 ㆍ 생리적 상태를 넘어서 사회문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복합 ‘현상’이다. ― <웰컴 투 갱년기> 19쪽
호르몬 약을 먹으면 유방암 걸릴 확률이 높아지니 먹을지 말지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을 들은 게 불과 십여 년 전인데, 의사들은 이제 ‘호르몬 치료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계몽의 목소리를 높인다. …… 힘들게 갱년기를 보낸 여성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소외와 외로움’의 감정은 그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의사들에게만 향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혹은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맥락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갱년기 담론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 같은 것이다. ― <웰컴 투 갱년기> 24∼25쪽
모두에게 쾌락을 허하라 ― 노년의 성(性)과 사랑
데이드레 피쉘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2004년)는 통쾌하게, ‘노골적’으로, 늙은 여성들의 성적 욕망을 드러낸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여자들은 모두 65세 이상의 ‘늙은 여자 내지는 할머니들’이다. 그러나 50여 분 동안 이들이 솔직하고 쾌활하게 들려주는 성적 욕망과 사랑하기의 즐거움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을 특정 대명사로 부르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등장인물들 중에는 와니타처럼 할머니이면서 동시에 증조할머니인 여성도 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할머니’라는 단어는 단순히 친족 안에서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표일 뿐이다. ― <모두에게 쾌락을 허하라> 64∼65쪽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에 둘러싸여 ‘소녀처럼’ 순진하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더는 섹시한 란제리를 입을 필요가 없는, 아니 아예 그런 욕구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불경스럽게 여겨지는 ‘할머니.’ 이렇게 사회문화적으로 ‘할머니’에 달라붙은 ‘비(非)성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의미는 평생을 재기발랄하게 자기 멋대로 살아 온 싱글 여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라면 일정 연령대에 누구나 ‘아줌마’가 되듯이 그렇게 일정 연령대가 되면 또 누구나 할머니가 된다. ― <모두에게 쾌락을 허하라> 65쪽
마음껏 춤출 자유, 마음껏 늙어 갈 자유
현대 무용가 안은미의 공연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보고 온 날, 나는 집에서 막춤을 추며 내 몸이 말하게 했다. 며칠 동안 내내 혼자 막춤을 추며 흥겨워했다. 안은미는 2010년부터 세 대의 카메라를 들고, 네 명의 젊은 무용수들과 함께 자전거로 전국을 돌며 밭에서, 경로당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구멍가게 안에서 마주친 할매들에게 즉흥적으로 ‘춤 좀 춰보시라’ 권했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춤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다. 이 공연은 춤과 몸의 관계를 더할 나위 없이 통쾌하게 해방적으로 가르친다. ― <마음껏 춤추는 몸> 88쪽
늙어 가는/늙은 사람에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울 것, ‘아직도’ 늙지 않은 몸과 삶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연령주의-미 산업의 음험한 책략은 여성들의 삶을 왜곡하고, 자기 흥에 몸을 싣고 마음껏 늙어 갈 기회를 박탈한다. 이러한 사회문화 환경에서 늙어 가는 몸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춤을 추는 여성/무용수들은 몸이 품고 있는 시간성과 역사성의 주름들을 한껏 펼쳐서 새로운 의미를 낳는 전위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 …… 제발 노년으로, 뚱뚱하고 처진 몸으로 ‘분장하는 게’ 아니라 뚱뚱하고 처진 몸‘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맘껏 춤추시라. ― <마음껏 춤추는 몸> 90쪽
어둠 속의 항해 ― 치매라는 공포
더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치매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공포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치매의 날’이 만들어지고, 2017년부터 시행된 ‘치매국가책임제’에 따라 2019년 현재 전국 256개 보건소에 치매안심센터가 설립되어 예방, 검진, 관리 서비스와 치매가족휴가제를 제공하고 있지만, 대중의 마음은 불안이나 두려움, 심지어 공포에서 해방될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가가 나서서 치매 예방 · 관리를 ‘선포’하고 나선 것인데, 바로 그 ‘선포’에서부터 계속 불안의 바이러스가 퍼져 나간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없애야 한다는 태도로는 결코 완전히 없애지지 않는 질병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 ― <치매라는 공포> 102쪽
나는 거의 20년이 넘게 치매 상태에서 사는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 매번 엄마를 만날 때마다 ‘그날의 문장’이 있었다. 몇 시간이고 그 문장이 반복된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이쁘네. 코도 눈도 눈썹도 이도 다 너무 이뻐.’라거나 ‘오늘 나랑 같이 자고 내일 우리 집 가자.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여기 침대에서 자.’라거나 ‘내가 죽기 전에 너희 집 가서 살다가 죽으면 소원이 없겠는데.’라거나. …… 대부분 나는 한 시간 정도 엄마의 문장을 토대로 삼아 엄마와 나름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적어도 두 번 정도는 나의 대답과 질문에 엄마가 응답하고 다시 본래의 문장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대화는 이어졌다. …… 언어 능력, 혹은 언어적 존재에 대한 ‘비-치매인들 중심’의 정의나 생각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치매라는 공포> 106, 108쪽
격리된 노인요양시설에서 ‘돌봄’ 문제를 마주하다
정기적으로 노인요양시설을 방문하던 시기가 있었다. 엄마가 ‘중증 치매’를 앓았기 때문이다. …… 아주 가끔 엄마와 한방을 쓰시는 다른 할머니들의 손도 잡곤 했는데,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 손을 너무나 꽉 잡고 놓지 않으려 해서 결국에는 강제로 그분들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다시피 해서 손을 빼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바스라질 것처럼 마른 몸, 말 그대로 뼈만 남은 앙상한 손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는 걸까. …… ‘예방’과 ‘보호’를 위한 가장 손쉬운 방식이 격리다. 그런데 이 격리가 무엇을 얼마나 더 악화시키는지, 어떤 고통을 더 만들어내는지, 그렇지 않아도 ‘붙잡을 무엇이 없어’ 불안한 몸들의 삶은 얼마나 더 불안해졌는지 깊이 생각한다면, 가장 손쉬운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을 찾아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 ― <그곳에 ‘노년’이 살고 있다> 114, 115쪽
영화 <아무르>가 묻는 것들 ― 나이 듦과 질병, 그리고 자유죽음
단순히 ‘경동맥 수술이 잘못되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뇌졸중이 왔다, 점점 나빠지다가 마지막 날을 맞게 될 것이다’라는 식의 의료 보고 동사만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진행형 동사가 있음을 느껴보자고 영화는 제안한다. ‘안느’에게 이런 일이 생겼고,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조르주’는 평생을 반려로 살면서 지키려 애쓴 믿음과 신뢰 속에서 (안느의 숨을 멈추려고) 베개를 집어 든다. …… <아무르>는 질병이나 나이 듦의 신체적 징표가 개인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고 더 나아가 낭패나 재앙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라면 그 누구도 ‘자기만의 죽음’을 죽을 수 없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갈 때> 156, 157쪽
정치하는 할매들, 부정의한 ‘아버지의 법’과 맞장 뜨다
한국에서 정의롭지 못한 정치경제 행태에 맞서 저항이 있을 때마다 주류 반동 세력이 예외 없이 꺼내는 이름은 ‘배후 세력’이다. ‘종북 빨갱이’ 같은 호명은 분단국인 만큼 여전히 일정 부분 효력이 있어 그들이 걸핏 하면 주저 없이 빼 쓰는 만년 적금 같은 것이다.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의 경우에도 역시 ‘배후 세력’ 혐의가 대두되었고, 혈서 쓰고 단식하는 군수와 함께 투쟁을 시작했던 군민들은 이 어이없고 어리석은 게임에 유희의 정신과 진지한 의지로 맞섰다. <파란나비효과>를 여러 번 되돌려 본 나는 이 투쟁에 아닌 게 아니라 배후 세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할매들이다. 쑤시는 무릎을 참아 가며 집회 현장에 앉아 ‘사드는 안 된다’ 외치고, 인간 띠 잇기를 벌일 때 아픈 허리를 참아 가며 긴 시간 꼿꼿이 서서 버틴 할매들. ― <‘어머니의 이름’으로> 239쪽
김영옥
60대 중반에 들어선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페미니즘과 인권을 수련했다. 공부와 수련 과정 내내 언어의 표현할 수 없는 마력과 표현되어야만 하는 정치력에 매혹되었다. 최근 몇 년간 몸-마음으로 늙어 가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50대가 다 끝나도록 ‘인생’이라는 단어가 싫었고, ‘삶’이라는 단어가 좋았다. 삶에서는 ‘살다’라는 동사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살면서 만들어내는 변화가 그려졌다. 반면에 인생은 책장에 꽂혀 있는, 닫힌 책 같았다. 그 안에서는 망설임도, 앞으로 나아갔다가 뒷걸음치는 시행착오도 미리 예견된 운명의 일렬 배치일 것만 같았다. ‘여자의 일생’이라는 말이 연상되는 것도 싫었다. 그러다가 60대에 들어서며 인생이라는 단어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오히려 삶이 건조하게 느껴진 반면, 인생에서는 물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비가 아닌 굽이에서, 알 듯 모를 듯 묘한 표정을 띤 채 숨어 있는 비밀스런 인생의 사금파리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지은 책으로 《노년은 아름다워: 새로운 미의 탄생》, 《이미지 페미니즘》,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공저)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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