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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 ‘두 형제’ ‘수정 구슬’ ‘북 치는 소년’까지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으로 밝히는 남성 심리의 비밀!
‘괴물 아버지’ ‘마녀 어머니’에 맞선 목숨 건 투쟁
그림 동화에서 찾아낸 남자의 내적 성장의 비밀
현명한 소년 헨젤은 왜 두 번이나 자신을 버린 부모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길에는 왜 항상 거인이나 불을 뿜는 용, 늙은 마녀가 등장할까? ‘영웅’에게 ‘상으로 주어진 처녀’는 처음 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괴물을 무찌르고 보물을 찾은 젊은이는 모험이 끝난 후에 어떻게 살았을까?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는 19세기 독일의 그림 형제가 옛이야기들을 수집해 엮은 ‘그림 동화(Grimms Märchen)’ 중에서 드물게 남자의 내적 성장을 그린 동화 네 편을 다룬다. 저자는 비밀스런 마법과 신화적 모티프와 암호 같은 상징으로 가득한 그림 동화를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심층심리학과 상담실에서 얻은 수많은 실제 사례를 통해 인간 내면을 밝히는 생생한 현실의 이야기로 되살려낸다.
끈질긴 의존 욕구를 떨쳐내고 자유와 독립을 찾아가는 ‘헨젤과 그레텔’, 타인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두 형제>의 젊은 사냥꾼, 마법에 걸린 공주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이해하게 되는 <수정 구슬>의 셋째 아들, 어머니와 연인 사이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사랑의 목소리를 따라 성숙한 남자로 거듭나는 ‘북 치는 소년’……. 억압적인 아버지의 질서와 어머니의 뒤틀린 사랑에서 벗어나 추락의 두려움과 상실의 불안을 이겨내고 자기 실현에 이르는 내면의 모험을 만난다.
‘헨젤과 그레텔’ ‘두 형제’ ‘수정 구슬’ ‘북 치는 소년’까지,
자기 소외의 저주를 푸는 사랑의 힘,
분열된 내면을 통합하는 정신의 모험
독일의 정신분석가이자 신학자인 오이겐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 20여 편을 분석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시리즈를 통해 작가로서 널리 이름을 알렸다.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에서 우리의 삶과 성격을 결정짓는 정신의 원형적 체험을 발견한다. 앞서 출간된 두 권의 ‘그림 동화 심리 읽기’(《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2》)에서 <재투성이(신데렐라)>, <라푼첼>, <백설 공주>를 비롯해 여성의 내적 성장을 다룬 동화 여덟 편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 소개하는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에서는 남성 심리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화롭고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기 위해 남자가 거쳐야 하는 정신의 모험을 그린 동화 네 편을 다룬다. 이 동화들은 대체로 ‘사악한 용’이나 ‘마법사’로 나타나는 ‘아버지’와 ‘못된 계모’나 ‘(늙은) 마녀’로 그려지는 ‘어머니’ 아래서 성장하는 소년이 겪는 불안을 들여다본다.
흔히 동화는 어린이나 여자들이 읽는 것이라 여겨져 왔다. “유약하고 울먹이는 자, 보호하면서도 보호받고자 하는 자, 몽상에 빠지고 빈둥거리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는 자”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남자에겐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레버만은 남자들에게야말로 동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는 네 편의 남성 동화는 자기 삶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남자들과 이 시대의 보편적인 남성성에 의문을 품은 여성들에게 중요한 텍스트가 된다.
이 책에서 드레버만은 자신의 상담실을 찾아온 많은 남성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수천 년 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바람직한 남성상으로 여겨져 온 것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보여준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삶. 그것은 느껴지는 것을 느끼지 말아야 하고, 느끼는 것과 정반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삶을 뜻한다. 이런 남자는 타인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내면이 분열된 채 자기 과시와 강요와 위협으로 사랑을 흉내 낸다. 여기 소개하는 네 편의 동화는 이런 파국의 길에서 벗어나는 내면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앞으로는 ‘영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어떨까? ‘영웅’은 무언가를 죽이는 데 ‘용맹’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팎에서 자라나는 충만한 아름다움을 참을성 있게 아끼는 사람이라고. 필요하다면 말 그대로 시체를 밟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 살기 위해 보호받아야 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살피는 사람이라고. …… 수천 년 동안 오로지 ‘군인’과 ‘전사’만이 ‘사나이답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옳은’ 일을 위해(‘하느님과 국왕과 조국’, ‘하느님과 교황과 교회’ 또는 그 밖의 어떤 세속적 삼위일체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자’였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그들은 대개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킬 것까지 각오한 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다. 그래야만 남성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두 형제>·231쪽
그림 동화, 인간 심리의 원형적 상징
‘그림 동화(Grimms Märchen)’는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독일 지역에 전해 내려온 옛이야기들을 모아서 엮은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1812~1814년 초판 발행)라는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가리킨다.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를 단순히 재미있는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현실, 특히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로 인해 겪는 내적 갈등이 투영된 텍스트로 본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베개 밑에 금덩어리가 생긴다거나, 굶주린 아이들 앞에 과자 집이 나타난다거나, 말하는 동물과 길동무가 된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이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생생한 현실인 것이다. 다만, 무의식적 불안과 충동, 강박, 콤플렉스가 다양한 문학적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뿐이다.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그림 동화에 들어 있는 여러 원형적 상징과 동화 속 인물들의 내면을 차근차근 풀어 보여준다.
한편으로 저자는 프로이트나 융의 상징 분석을 일반화하여 상투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동화 속 인물이나 사건을 무언가를 대표하는 ‘전형’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상황에 놓인 현실의 사람 혹은 사건으로 여겨야 한 편의 동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술 반지, 요술 안장, 요술 모자라는 동화 모티프는 자주 나타나지만, 심층심리학적으로 이런 모티프를 해석할 때는 판에 박힌 일반화를 경계해야 한다. 프로이트 학파는 이런 상징들에서 예외 없이 ‘성적’ 암시를 찾아낸다. …… 융 학파에서는 ‘모자’를 둥근 모양 때문에 만다라의 상징이자 ‘자기’의 비유로 풀이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수정 구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후에 나오는 수정 구슬을 앞에서 이미 모자가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체로는 올바르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과 관용구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온갖 해석 경향을 모두 허용하는 ‘요술 모자’에 불과하다. - <수정 구슬>·431, 433쪽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삼아 쓴,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울리는 보기 드문 인문 교양서이다. 여기서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를 구성하는 여러 상징과 모티프들이 세계의 신화와 전설은 물론이고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과 케테 콜비츠의 판화, 바그너의 오페라, 카프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 장르를 초월해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음을 확인한다.
예를 들어, 케테 콜비츠의 판화 <빵을!>에서 배고픈 자식을 외면하는 어머니의 고통스런 뒷모습은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숲에 버리는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두 형제>에서 주인공이 치르는 ‘용과의 싸움’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레르나의 뱀 ‘히드라’를 물리치는 이야기와 게르만 신화 속 영웅 지구르트의 모험담에서 반복되고, <수정 구슬>의 세 형제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세 형제가 각각 상징하는 인간 유형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동화에는 ‘상으로 주어지는 처녀’라는 모티프가 자주 등장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로는 딸을 시집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혹은 딸 자신)은 구혼자들에게 조건을 내건다. 그리고 구혼자들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 …… 이 ‘상으로 주어지는 처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여자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던져서 부모와의 애착 관계라는 마력의 그물을 찢을 수 있는 사람뿐이다. 그러려면 가령 <수정 구슬>에서처럼 씩씩거리는 괴물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필요하다. 아니면, 그리스 신화에서 펠롭스가 사랑하는 히포다메이아를 얻으려고 엘리스의 왕 오이노마오스와 전차 경주를 벌인 것처럼, 우선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와 목숨을 건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 <북 치는 소년>·545, 546쪽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를 읽다 보면 예술과 역사, 심리학, 신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저자의 박학에 감탄하게 되지만,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은 바로 저자가 직접 상담실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동화와 절묘하게 겹쳐질 때이다. 지치고 우울한 어머니에게 사랑받으려고 음식을 아꼈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털어놓는 남자는 자신이 먹을 빵조각을 땅에 뿌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표시하는 ‘헨젤’을 떠올리게 하고,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파국에 이른 젊은 부부의 사례는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랑하는 공주를 까맣게 잊은 ‘북 치는 소년’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이렇게 동화와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 독자들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얻을 것이다.
현명한 헨젤은 왜 자신을 버린 부모의 집으로 거듭 돌아오는가?
<헨젤과 그레텔> 깊이 읽기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 동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에 속한다.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초판에서는 새어머니가 아니라 친어머니가 등장하고 부모가 공모하여 남매를 숲에 버리는 설정이었으나 어린이들이 받는 충격을 감안해 이후 판본에서 친모가 계모로, 아버지가 계모의 계획에 반대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고 전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헨젤과 그레텔>은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한 아이가 고독과 불안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는 내적 성장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한 사람이라면?
드레버만은 이 이야기가 오누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소년의 이야기라고 본다. 물론 마녀를 화덕에 밀어 넣어 죽이고 ‘헨젤’을 구하는 사람은 여동생 ‘그레텔’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헨젤이다. 그에 비해 그레텔은 순수한 은유로 볼 수 있다. 즉 소년의 내면에서 지적이고 활동적인 측면은 ‘헨젤’로 나타나고 슬픔과 향수로 가득 찬 다른 측면은 ‘그레텔’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한 소년을 상상해야 옳다.
이렇게 그림 동화에서는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두 측면이 곧잘 별개의 두 인물로 구현되곤 한다.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숲에 유기하는 비정한 새어머니는 곤경에 빠져 자식을 외면하는 (친)어머니, 아이의 요구를 거부하는 (친)어머니가 동화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고, 그런 어머니의 마음에서 분리된 일부가 선하지만 나약한 아버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
– 유아적 의존 욕구와 귀환 강박
<헨젤과 그레텔>에서 식인 마녀나 과자 집 같은 환상적인 요소를 빼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어디일까? 아마도 부모가 자기 남매를 버리려 하는 계획을 모두 엿들은 헨젤이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장면일 것이다. 심지어 두 번째로 버려진 날에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 고심한다. 헨젤은 부모의 끔찍한 계획을 듣고도 침착하게 동생을 달래고 하얀 조약돌로 집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현명한 소년이다. 그런 아이가 왜 자꾸 비극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드레버만은 부모와 아이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일체감, 유대감 때문에 헨젤 같은 아이는 계속 집으로 돌아오려 한다고 설명한다.
헨젤은 이제 자기에게 집이 없음을 또렷하게 알고 있다. 그럴수록 더욱 절실하게 아이는 집으로, 자기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버림받을 것’이라는 불안이 커질수록 아이는 최후의 ‘환상적’ 기대에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기 때문이다. - <헨젤과 그레텔>·59쪽
심리 치료를 하다 보면 자주 놀라게 되는데, 많은 사람이 아무리 거부당하고 실망하고 심지어 질책까지 받더라도 끈질기게, 얼핏 보기에 막무가내일 정도로 도움과 이해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들이 바라는 것을 애당초 얻을 수 없는 곳에서 말이다. ‘헨젤과 그레텔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해법은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삶을 헤쳐 나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이들은 왜 그러지 않는가? 부모들도 왜 솔직하게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하지 않는가? 이런 의문에 단순하고도 적절한 설명은,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 때문에 그런 ‘해법’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부모와 자식 모두 완수할 수 없는 책임들로 이루어진 어떤 시스템의 희생자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 시스템 안에 그대로 갇혀 있는 이유는 서로에게 느끼는 유대감을 그냥 무책임하게 끝장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헨젤과 그레텔>·62~63쪽
마녀에게 내미는 뼈다귀
- 거식증의 악몽
길을 잃고 숲속을 헤매던 헨젤과 그레텔은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과자 집에서 아이들을 환대한 할머니가 실은 사람 잡아먹는 마녀였음이 곧 드러난다. 드레버만은 식인 마녀가 남매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이는 오직 착한 아이가 되고자 노력했고 자기가 받은 것을 남김없이 어머니에게 바치려고 애썼다. … 자기 포기는 이제 선한 어머니를 되찾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악한 어머니를 피해야 한다는 목적을 추구하는, 일종의 고착된 관념이자 집착으로 변질된다. 아이 쪽에도 바로 이러한 과도한 면이 있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다시 사랑받으려고 모든 일을 시도해본다. 하지만 자기가 먹을 음식을 땅에 뿌리기까지 했는데도 어머니에게 버림받는다면, 어머니로 자처하는 이 여자를 마녀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생각이 은밀히 싹트지 않겠는가! - <헨젤과 그레텔>·88~89쪽
헨젤은 마녀에게 붙잡혀 우리에 갇힌 채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마녀는 아이가 통통해지면 잡아먹으려고 아이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데, 헨젤은 자기 손이 아니라 뼈다귀를 내밀어 시력이 나쁜 마녀를 속인다. 이 장면에서 드레버만은 ‘거식증’으로 도피하는 심리를 읽어낸다. “(거식증이라는) 방법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귀찮은 짐이 되지 않으려는 극단적 시도이다. 만약 바람과 같이 아주 가볍고 아주 부드럽게 땅 위를 떠다니면서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이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그레텔’이 마녀를 죽이는 이유
아무리 기다려도 헨젤이 살찌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마녀는 그냥 두 아이를 잡아먹기로 결심한다. 위기의 순간에 다행히도 그레텔이 기지를 발휘해 마녀를 화덕에 밀어넣어 죽이고 헨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마녀의 죽음’은 곧 소년이 ‘어머니’에 대한 중독 같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마녀를 죽이는 사람이 왜 그레텔일까? 그레텔은 내내 오빠의 말을 따르는 착한 동생이었고 두려움에 울먹이며 마녀에게 착취당하는 아이였다. 드레버만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레텔이 마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특이한 점은, 이런 현재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그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사람은 그레텔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레텔과 마녀의 관계는 열심히 봉사하고 극단적으로 착취당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관계를 모두 끝장내야 하고 이 관계에 연루된 인물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동화에서 어떤 적(거인, 마녀 등)이 살해되는 장면은, 이 모든 것이 아이의 환상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누군가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불안을 주는 콤플렉스가 자취를 감추고, 그러한 콤플렉스가 더는 의식에 존재하지 않으며, 불안을 일으키는 사람이 이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헨젤과 그레텔>·116~117쪽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길에는 왜 항상 용과 괴물이 기다리는가?
<두 형제> 깊이 읽기
<두 형제>는 그림 동화 중에서 가장 길고 복잡하며, 가장 흥미진진하고 다층적인 이야기이다. 우리 옛이야기 <흥부와 놀부>를 연상시키는 도입부에서 주인공 쌍둥이 형제는 욕심 많고 심술궂은 큰아버지의 모함(“네 아이들에게 악마가 붙은 거야.”)으로 억울하게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다. 다행히 쌍둥이는 숲에서 마음씨 좋은 사냥꾼을 만나 그의 양자가 되어 사냥꾼으로 자란다. 청년이 된 쌍둥이는 사냥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데, 함께 일할 곳을 찾을 수 없자 형은 동쪽으로 동생은 서쪽으로 간다. 서쪽으로 간 동생이 사악한 용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하러 나서면서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된다. 동생은 공주를 구해내고 그녀와 결혼하기까지 목이 잘렸다가 되살아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 뒤에도 한 차례 위기가 더 찾아온다.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 마녀의 마법에 걸려 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때 동쪽으로 갔던 형이 찾아와 동생을 구해준다. <두 형제>는 한 남자가 삶에 눈뜨고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겨내야 하는 온갖 위험을 그리고 있다.
욕심 많은 부자 ‘형’과 가난하고 착한 ‘동생’
– 동화 속 형제, 분열된 내면의 표현
그림 동화에서 ‘형제’는 보통 한 인격의 두 측면을 상징한다. <두 형제>에서는 주인공인 쌍둥이 형제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형제의 아버지와 그의 형이 등장한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으며 빗자루 만드는 일을 했다. 그의 형은 부유한 금세공사인데 욕심이 많고 심술이 사나웠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금세공사 형은 사회적 지위와 부(富) 같은 외적인 성과를 중시하는 태도를 상징하고, 빗자루 만드는 동생은 세계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느끼고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를 상징한다.
‘두 형제’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두 측면을 상징하는데, 이 측면들은 아무리 서로 모순되더라도 균형과 보완을 이루기 위해 서로를 통제하고 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부자이면서 착하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부유함과 선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이 <두 형제> 동화에서 맨 처음에 제기되는 물음들이다. - <두 형제>·180~181쪽
동화에서 빗자루 만드는 동생은 세상 물정에 어둡고 늘 형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른다. 동화가 아닌 현실에서 이것은 외적으로 성공하고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자기 안의 감성적이고 선량한 본성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런 측면을 멸시하는 남자를 의미한다. 빗자루 만드는 동생이 형의 명령에 따라 사랑하는 어린 아들들을 집에서 내쫓는 장면은 곧 이렇게 분열된 내면을 지닌 남자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냥꾼과 우정을 나누는 동물
이 동화에는 ‘용과 싸우는 영웅’, ‘사람을 돌로 만드는 마녀’, ‘동물과 나누는 우정’, ‘상으로 주어지는 처녀’ 같은 오랜 신화적 모티프와 상징들로 가득하다. 특히 사냥꾼 형제에게 도움을 주는 말하는 동물들(토끼, 여우, 늑대, 곰, 사자)의 활약상은 이야기를 한층 익살스럽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여기서 동물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은 보통 ‘성욕’을 비롯한 본능적 충동과 감정을 의미한다. 사냥꾼 형제가 토끼 같은 작고 연약한 동물에서부터 사자 같은 용맹하고 거친 동물까지 한 종씩 차례로 만나는 것, 사냥꾼임에도 동물들을 죽이지 않고 친구로 삼는 행위는 곧 형제가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낮은 단계부터 순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해를 끼치지 않는 토끼부터 시작해 영악한 여우와 난폭한 늑대와 무뚝뚝하면서도 선한 곰을 거쳐 제왕과 같은 사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동물과 만남에는 늘 똑같은 기본 규칙이 있다. 남성의 충동은 다양한 형태로 성장하며, 이러한 형태가 나타날 때마다 스스로 자기를 관찰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 <두 형제>·226쪽
공주를 구하는 모험에는 왜 항상 용과 괴물이 등장하는가?
동생 사냥꾼이 용과 벌이는 싸움은 <두 형제>의 절정을 이루는 에피소드이다. 전 세계의 신화와 민담에 등장하는 ‘용과의 싸움’은 온갖 영웅적이고 위대한 행위의 정점이었으며, 세계 창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신화 시대 이후로도 수많은 서사시와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이 책에서 드레버만은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 신화에서부터 구약성서, 이집트 신화, 그리스 신화, 북유럽 전설, 바그너의 오페라, 토마스 만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용과의 싸움’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각각의 의미를 추적한다.
‘용’과의 싸움이라는 모티프는 이 세상의 본질과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모티프는 동시에 신화라는 수단으로 ‘우주’의 ‘유래’와 사물의 ‘존재’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고신인 마르두크와 바다 괴물 티아마트가 싸움을 벌이는데, 마르두크는 이 태초의 존재를 죽인 후 반토막 난 두 몸뚱이로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티아마트의 (눈물 흘리는?) 두 눈에서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마르두크는 바빌로니아 만신전에서 모든 신의 지배자가 되었다. - <두 형제>·247쪽
그렇다면 그림 동화 <두 형제>에서 ‘용’은 무엇인가?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처녀(공주)’를 잡아먹는 괴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층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괴물은 바로 딸의 성장과 독립을 가로막는 ‘아버지’이다.
동화에 따르면 여러 해 동안 젊은 남자들이 그 괴물을 막는 데 목숨을 걸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야수’는 언제나 반복해서 정확한 시간에 ‘순결한 처녀’를 바치라고 요구한다. 산 위에 처녀를 가져다 두지 않으면 ‘온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상징의 언어가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명확하게 아버지라는 인물의 ‘분열’을 뜻한다.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딸에게 보호와 안전을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면 모두 없애버릴 것이라고 을러댄다. …… 아버지와 딸 사이의 ‘불안 속의 애착’ 때문에 독자적 성장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공주’는 삶에서 한 발 앞으로 나갈 때마다 (아버지) 용이 콧구멍에서 불을 뿜으며 자신을 ‘꾸짖는 것’을 겁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녀는 영원한 ‘소녀’여야 한다. 결코 성숙한 여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두 형제>·282~283쪽
젊은 사냥꾼은 왜 낯선 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가?
– ‘구원자 환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공주를 그녀의 괴물 아버지에게서 구해내는 영웅은 어떤 사람인가? 많은 동화에서 위기에 처한 공주의 소식을 듣고 그녀를 구하려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용감한 젊은이가 등장한다. <두 형제>에서 동생 사냥꾼은 온 나라의 처녀들을 잡아먹은 사악한 용을 죽이면 공주와 결혼하고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하지만 그를 모험으로 이끄는 것은 미래에 얻을 보상의 유혹이 아니다. 게다가 동생이 공주를 구하려고 결심했을 때 그는 공주를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낯선 공주를 위해 목숨을 거는가?
드레버만은 이 젊은 사냥꾼이 “과제의 위대함”에 매혹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쌍둥이 형제는 어린 시절에 자신들이 지닌 재능(‘매일 아침 베개 밑에 금덩어리가 하나씩 생겨나는 것’) 때문에 큰아버지에게 미움을 사고 아버지에게서 외면당했다. “능력 때문에 고향을 잃은 자, 탁월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추방된 자”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은 본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쉽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믿게 된다. 용과의 싸움에 나서는 동생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런 욕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데 의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남을 구하는 위대한 행위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진다. 자신의 존재가 불안할수록 틀림없이 자신이 쓸모 있는 위대한 일거리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그림 동화의 젊은 남자는 ‘용’과의 싸움을 통해 자기 영혼을 구하려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그야말로 ‘자기’ 삶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면 결코 ‘공주’를 구하는 데 자기 목숨을 걸지 않을 것이다! - <두 형제>·280쪽
‘용’을 물리쳐 공주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얻음으로써 동생 사냥꾼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이 기본적으로 사랑받을 만하지 않다는 오랜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결국 용과의 싸움은 공주를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구원하는 싸움이면서 동시에 사냥꾼이 자기 내면의 아버지로부터 풀려나는 기회이다.
공주를 구한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
많은 동화에서 주인공 남자는 공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구하러 나서는 것이 아니라 공주를 구해냄으로써 그녀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북 치는 소년>에서 얼굴도 모르는 공주에게 연민을 느껴 예상되는 위험을 무릅쓰는 주인공도 <두 형제>의 동생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구원자 환상’에 빠진 사람이다. 이런 남자가 현실에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책에서 드레버만은 실제로 ‘구원자 환상’에 매몰되어 연인과 관계를 망치는 남자들의 사례를 보여준다. 남자는 자신이 연인을 그녀의 사악한 용 같은 ‘아버지’에게서 구해냈다고 믿지만, 곧 무의식적으로 또 다른 ‘아버지’가 되어 연인을 구속하기 시작한다. 그는 연인이 자유롭기를 바랐으나 정말 그렇게 되려고 하자 무시무시한 위기감을 느낀다. 연인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좋지만 나에게서 자유로운 것은 견딜 수 없다. 그의 마음을 채운 것은 이런 믿음이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강하다. 나는 그녀의 행복이다. 나는 그녀에게 구원이다. 나는 그녀에게 ‘왕’이다.” 이런 관계가 제대로 이어질 리 없다.
한 남자는 결혼 생활의 비극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제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저는 그녀가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이야말로 아내를 사랑하게 된 주된 이유였습니다. …… 그녀는 제가 자기 앞에서나 온 세상 앞에서 영웅 노릇하기를 좋아한다고 비난하더군요. 제가 평범한 여자에게는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스스로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강하고 탁월하고 훌륭한 남자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제가 그녀 곁에 있을 때면 남자로서 어떤지를 언제나 그녀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그녀는 이제 진실만을 말한다고 하더니, 제 곁에서 어떤 느낌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 이런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거의 그녀를 때릴 뻔했습니다. …… 우리는 이제 이런 상태입니다! 저는 제가 한 번도 소유한 적이 없었던 여자를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 <두 형제>·323~325쪽
‘독수리’와 ‘고래’가 된 마녀의 아들들
<수정 구슬> 깊이 읽기
<수정 구슬>은 ‘마녀 어머니’에게서 도망치는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옛날 옛적에 우애가 두터운 세 형제가 있었다. 형제의 어머니인 마녀는 아들들이 자기 힘을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해 맏아들은 독수리로, 둘째 아들은 고래로 변신시켰다. 셋째 아들은 어머니가 자기를 곰이나 늑대로 변신시킬까 봐 두려워 몰래 달아난다. 그는 우연히 나쁜 마법사에 의해 황금 태양의 성에 갇힌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구하러 나선다. 공주를 구하려면 수정 구슬이 필요한데, 셋째 아들은 동물이 된 두 형의 도움을 받아 과제를 해결하고 공주를 구한다. 이 동화는 어머니의 금기와 억압 속에서 도망친 소년이 사랑을 통해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발견하는 험난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림 동화’에서 만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 동화에서 마녀의 세 아들은 한 남자의 ‘분열된 내면’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내면에 ‘독수리’ 같은 측면과 ‘고래’ 같은 측면, 그리고 자신이 야수로 변할까 봐 불안에 떨며 도피하는 인간의 모습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융 학파의 상징 분석을 이 동화에 적용해보면 “독수리는 지성과 직관 같은 정신적 힘을 상징”하고 “고래는 감정과 충동과 감각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세 번째의 인간이라는 형상은 자아를 상징”한다. 동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인 네 번째 인물 즉 공주가 등장하는데, 이때 여성은 ‘아니마’ 즉 무의식과 사랑의 세계를 상징한다. 드레버만은 문학 작품과 겹쳐 읽기를 통해 이러한 동화 속 상징들을 생생한 현실로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놀랍게도,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세 형제 이반, 드미트리, 알렉세이가 <수정 구슬>의 세 아들과 정확히 대응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라는 인물을 통해 독수리가 상징하는 인격의 가장 충격적 실례를 보여주었다. …… 그렇지만 독수리는 이러한 내적 분열의 초상에서 한 측면만을 보여준다. 그 맞수는 고래이다. 독수리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는 지성을 상징한다면, 고래는 어둡고 둔중한 충동을 상징한다. 자아는 이러한 충동을 지극히 낯설고 통제 불가능하고 막강한 힘으로 느낀다. 고래라는 형상에서는 특히 여성을 향한 남성의 갈망, 무한한 그리움, 드넓은 ‘대양’ 같은 느낌, ‘무한의 사랑’이 나타난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한 지적인 인물 이반에 맞서, 활기차고 충동적인 드미트리가 등장한다. 드미트리는 고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 <수정 구슬>·409, 411쪽
가부장 질서에 맞서 싸우기
공주는 마법에 걸려 아름다운 얼굴이 흉측하게 변한 채 성에 갇혀 있다. 공주에게서 아름다움을 빼앗은 마법사는 누구인가? 드레버만은 여기서 이 마법사와 같은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한 여성의 상담 사례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딸을 ‘공주’처럼 떠받들며 키웠다. 사실 그에게 아름답고 영리한 딸은 일종의 트로피였다. 심각한 열등감과 자기 회의에 빠진 남자가 딸이 자기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승인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에게서 자라는 딸은 자신의 삶을 살 권리를 얻지 못한 채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늘 아버지에게 능숙하게 봉사하면서 자기에게 낯선 외적인 역할을 해내야 하는 그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자신의 진실과 현실이 공주답게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가장 두려워하고, 자기 삶의 진실에 사람들이 실망해 등을 돌릴지 모른다고 끊임없이 두려워한다. - <수정 구슬>·446쪽
공주가 마법에서 풀려나 아름다움을 되찾고 성을 나가려면, 즉 현실에서 공주와 같은 딸이 자신의 삶을 찾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믿으려면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곧 ‘내면화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아들은 마법사를 물리치기 위해 ‘수정 구슬’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수정 구슬을 얻으려면 먼저 사나운 야생 들소와 싸워 이겨야 한다. 공주를 사랑하고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는 자는 ‘황소’, 즉 그녀 아버지의 ‘두 뿔’을 붙들고 그의 권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황소와의 싸움은, 연인이 유년기에 조금이라도 사랑을 향한 갈망을 보이면 아버지가 딸에게 퍼부었던 금지와 유보와 욕설과 저주와 악에 받친 잔소리들을 다시 한 번 불러내는 것이고, 오래전부터 그토록 절망적으로 보이던 아버지와의 결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딸이 다른 남자와 키스나 포옹을 하는 정도만으로도 자살을 하겠다거나 딸을 죽이겠다고 마구 위협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곧바로 말해야 한다. 당신 삶을 그렇게 딸의 삶과 하나로 만들어서 딸이 질식할 것처럼 느끼게 만들 권리가 당신에겐 없다고. …… 특히 아버지에게, 부녀 관계와 부부 관계에서 온갖 유형의 가부장적 ‘질서’에 가장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딸의 영혼이 저 하늘의 비둘기처럼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이다. - <수정 구슬>·454~455쪽에서
한편, 셋째 아들에게 야생 들소를 무찌르는 일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자기 아버지나 연인의 아버지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는 것은 곧 지배적인 남성성, 뿔 달린 수소 같은 마초의 정서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셋째 아들의 내면에서 우선 남성성과 여성성이 통일되어야, 셋째 아들이 사랑하는 공주와 영원히 결합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룰 자격을 갖추게 된다. “마초와 난폭한 자와 억센 자뿐 아니라, 유약한 성자나 허약하여 온유한 자나 싸움이 두려워 너그러운 자도 공주를 구하지 못한다. 불안과 열정에 휩싸인 채 자기 자신을 이기는 법을 배운 자만이 유리산의 성에서 왕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아들로 남을 것인가, 성숙한 연인이 될 것인가?
<북 치는 소년> 깊이 읽기
<북 치는 소년>은 마법에 걸린 공주를 구하러 모험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수정 구슬>과 닮았다. ‘북 치는 소년’은 어느 날 저녁 호숫가에서 아마포 한 장을 줍는다. 그날 밤 소년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옷을 돌려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인은 자신이 어떤 나라의 공주인데 마녀에게 붙잡혀 유리산에 갇혀 있으며, 두 언니와 호수로 매일 목욕을 하러 오는데 그 옷이 없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소년은 곧바로 옷을 돌려주고 날이 밝자마자 공주를 구하러 씩씩하게 모험을 떠난다. <북 치는 소년>은 ‘어머니’와 ‘연인’ 사이에서 헤매던 남자가 마침내 사랑의 목소리를 따르며 성장하는 내적 여정을 다루고 있다.
소년은 왜 ‘날개옷’을 곧바로 돌려줄까?
<북 치는 소년>의 도입부는 우리 옛이야기 <선녀와 나무꾼>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천상의 여인’이 날개옷을 빼앗기고 그 옷을 훔친 사람에게 억지로 잡혀 있게 된다는 내용의 신화와 동화를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설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화에서 이러한 강제적 ‘결혼’은 언제나 깨어질 위험을 품고 있다. 갇힌 연인은 언제라도 날개옷을 다시 찾아 자유를 누리던 예전의 왕국으로 선뜻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동화와 신화는 사람이 일방적인 구속이나 강제적인 의존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떤 사람을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그에게서 자유로운 옷을 영영 빼앗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언젠가는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고 사랑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원래 자신이 지닌 위대함을 향해 날아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항상 시달릴 수밖에 없다. - <북 치는 소년>·523쪽
그러나 <북 치는 소년>은 같은 설정으로 시작하는 다른 동화들과 좀 다르다. 여기서 공주의 날개옷은 자유를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녀의 압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 ‘북 치는 소년’은 선녀를 붙잡으려고 날개옷을 감춘 나무꾼과 달리 여인의 간청에 곧바로 옷을 돌려준다. 그는 공주를 소유할 절호의 기회를 왜 활용하지 않는가?
우리는 북 치는 소년의 행동을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무심함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북 치는 소년의 성격이 염치 있고 점잖기에, 다른 사람을 발가벗기거나 소유하지 않고, 덮어주고 알고자 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프랑스에는 “진정한 사랑은 영혼이 육체를 덮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바로 그렇게 <북 치는 소년>에서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 그녀의 옷을 돌려주는 일과 맞물린다. 사랑의 으뜸가는 기예는 아마도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듯이’(<마태복음> 25장 36절) 그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리라. - <북 치는 소년>·524쪽
구원받는 구원자
대부분의 동화, 신화, 전설, 민담에서 위기에 처한 공주는 수동적으로 ‘구원자’를 기다리는 역할을 맡는다. “자기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상황을 전제해야 비로소 구원을 구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구원자’라는 인물에게 집중되고, 대개 여자인 구원받는 자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하지만 <북 치는 소년>에서는 공주가 자신을 구하러 온 ‘구원자’를 먼저 구원한다. 늙은 마녀의 집에서 머물기 위해 ‘북 치는 소년’은 세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가 좌절할 때마다 한 소녀가 나타나 도와준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과제를 해결하자 그 소녀가 마법에 걸린 공주였음이 드러난다.
‘구원받는 구원자’라는 신화에 깃든 깊은 진실은, 물론 북 치는 소년이 마녀를 불 속으로 밀어 넣어 공주를 구원했으나, 북 치는 소년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공주에 의해 불안들로부터 구원받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사랑이 상호적이라는 데 비추어 보면 영웅의 독립성은 별 쓸모가 없다. 그리고 유리산 위에서 북 치는 소년이 겪은 두 번의 실패가 아무리 쓰라렸더라도, 이제 그 실패는 충만한 축복으로 나타난다. 그 실패는 북 치는 소년에게 감사의 행복을 가르쳤다. 그 행복을 통해서, 선사하는 자는 선사받는 자가 되고 그리워하는 자는 그리워지는 자가 되며 구원하는 자는 구원받는 자가 된다. ― <북 치는 소년>·569쪽
어머니의 ‘착한 아들’로 퇴행하는 남자
<북 치는 소년>에서는 공주를 구해낸 일이 곧바로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녀가 죽고 마법에서 풀려난 공주는 스스로 ‘북 치는 소년’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마녀의 오두막에서 엄청난 보물을 발견한다. 공주와 함께 유리산에서 내려온 북 치는 소년은 자신이 먼저 부모님에게 소식을 알리겠다며 공주를 성문 밖에 세워 둔 채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부모의 집으로 돌아간 북 치는 소년은 그만 공주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유리산에서 가져온 보물로 커다란 성을 짓고, 북 치는 소년은 부모의 바람대로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 사실을 안 공주는 ‘북 치는 소년’의 침실 앞에서 그를 애타게 부르며 노래를 부르고, 마침내 기억이 되살아난 북 치는 소년은 ‘진짜 신부’와 ‘진짜 결혼식’을 올린다.
현실에서 북 치는 소년 같은 남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부모에 대한 유아적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이며, 성숙한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삶으로 들어가려는 문턱에서 퇴행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와 ‘연인’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연인과 어떤 약속을 했는지 망각하는 남자들을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부모는 자기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한다. 부모는 북 치는 소년이 이제 어떤 사람인지 전혀 판단하지 못하면서 그의 아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감히 판단하는 것이다. “좋은 뜻으로 그러시는 거야.” “부모는 자식 잘되는 것만 바라니까.” “이 아이는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해.” 이런 식의 말들은 부모가 자식을 독차지하여 보살피는 일을 정당화하려는 표현이다. 그리고 북 치는 소년은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화는 “부모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좋았습니다.”라고 그의 태도를 설명한다. 이 무시무시한 문장은 거의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표현되기에 더 무시무시하다. - <북 치는 소년>·579쪽
지은이 · 옮긴이
오이겐 드레버만(Eugen Drewermann)
독일의 신학자, 평화운동가, 심리학자. 독일은 물론이고 전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신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40년에 도르트문트 인근 베르크카멘에서 태어났다. 철학, 신학,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1966년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신부이자 정신분석가로 활동하면서 1979년부터 파더보른의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비교종교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드레버만은 성모 마리아의 처녀 수태, 예수의 부활 등 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축자적인 성서 해석을 비판하면서 성서를 상징과 비유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가톨릭 교리에 관한 드레버만의 논쟁적인 견해는 로마 교황청의 우려를 샀다. 결국 가톨릭 지도부는 1991년에 대학에서 강의를 금지한 데 이어 1992년에 그를 신부직에서 파면했다. 평화운동가로서 드레버만은 걸프전과 이라크전쟁을 비롯해 독일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2002년에는 달라이 라마와 종교간 소통을 주제로 한 공동 저작을 내기도 했다. 2007년에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에리히 프롬 상’을 수상했고, 2011년에는 인도주의와 환경 문제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상’을 받았다.
드레버만은 1992년부터 저술과 강연, 심리 상담에 힘쓰고 있으며, 현재까지 80여 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그의 저술은 1990년대 초에 벌써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전 세계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중에서도 그림 형제의 동화 20여 편을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시리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 심리학과 철학과 신학을 넘나드는 탄탄한 지적 기반이 어우러진,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울리는 보기 드문 인문서로 호평을 받았다.
옮긴이 · 김태희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본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상학의 현대적 해석에 기초하여 인지과학, 심리학, 사회과학, 질적 연구 등과의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민음인문학기금 최우수 박사학위논문상 및 서울대학교 철학과 최우수 박사학위논문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 《비판적 사고와 토론》(공저), 《과학기술 글쓰기》(공저), 《인문사회 글쓰기》(공저)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시간 추적자들》《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생각 없이 살기》《종교 본능》《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나치의 병사들》 등이 있다.
차 례
∽ 헨젤과 그레텔 ∽
•들어가는 글 _ 남자아이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버림받은 아이 - “나무꾼은 워낙 가난하여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좋은 어머니’는 왜 아이를 버리는가? - “숲에 두고 오면 아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요.”
거짓말 하는 부모, 침묵하는 아이 - “푹 쉬고 있거라. 다 끝나면 데리러 오마.”
의존 욕구와 귀환 중독 - “아이들은 밤새 걸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식인 마녀와 거식증의 악몽 - “노파는 아이를 죽여서 요리를 만들어 먹었는데…”
내면의 ‘마녀’ 어머니와 결별하기 - “오빠, 우리는 풀려났어. 늙은 마녀는 죽었어.”
유년의 시련과 보상 - “그레텔이 앞치마를 흔들자 진주와 보석이 떨어졌습니다.”
∽ 두 형제 ∽
•들어가는 글 _ 공주를 구한 남자는 집에 돌아와 무엇을 하는가?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분열된 아버지’ - “형은 부자였고, 동생은 가난했습니다.”
추방당한 아들 - “네 아이들에게 악마가 붙은 거야.”
감정 수업 - “형제는 해맑게 노는 새끼들을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용을 죽이는 ‘영웅’ - “임금님은 용을 물리치는 자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머리가 일곱 개 달린 괴물 - “사냥꾼은 이제 공주가 용에게서 풀려났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되는 구원자 - “대신은 사냥꾼의 목을 베고 처녀를 안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무력한 조력자’ - “대신은 처형되었고, 왕은 공주를 사냥꾼에게 주었습니다.”
거세 불안 - “마녀는 왕을 돌로 변하게 했습니다.”
형제의 귀환 - “다시 만난 형제는 서로 입을 맞추며 기뻐했습니다.”
∽ 수정 구슬 ∽
•들어가는 글 _ 사랑이라는 이름의 마법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괴물과 거인과 마법사의 세계 - “옛날 옛적에 마녀가 살았습니다.”
독수리와 고래, 분열된 내면 - “마녀는 맏아들을 독수리로 만들었습니다.”
내면의 야수로부터 도피 - “셋째 아들은 늑대로 변할까 봐 달아났습니다.”
사라진 아버지, 사악한 어머니 - “마녀는 아들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운명의 연인 ‘아니마’를 찾아서 - “마법에 걸린 공주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거인들의 요술 모자 - “대체 왜 이런 낡은 모자 때문에 싸우는 거죠?”
마법의 거울 - “제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거울을 보세요.”
황소, 내면의 아버지 - “당신은 사나운 들소와 싸워야 해요.”
불새의 알과 수정 구슬 - “불새가 떨어뜨린 알은 땅에 닿는 순간 모든 것을 태워버려요.”
사랑이 할 수 있는 일 - “지금부터 너는 황금 태양의 성의 왕이다.”
∽ 북 치는 소년 ∽
•들어가는 글 _ 사랑이 삶의 환멸을 구원하리라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사람 - “북 치는 소년이여, 일어나세요.”
질문이 깨우는 사랑 - “당신은 누구십니까?”
유리산에 갇힌 공주 구하기 - “나는 아무것도 겁내지 않아요.”
식인 거인들의 숲 - “요 꼬마 놈아, 왜 내 단잠을 깨우는 거냐?”
마녀의 집 - “저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주셨으면 합니다.”
구원받는 구원자 - “두려워하지 말고 마녀가 시키는 일을 하세요.”
귀환과 퇴행 - “아들은 부모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좋았습니다.”
뒤바뀐 신부 - “이 사람이 제 진짜 신부입니다.”
• 주석
• 그림 해설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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