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없는 소녀’ ‘백설공주’ ‘흰눈이와 빨간 장미’ ‘홀레 아주머니’까지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으로 밝히는 그림 동화의 이면!
‘손 없는 소녀’에서 ‘백설공주’까지, 삶과 운명을 결정짓는
근원적 심리 문제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
가족을 아끼는 방앗간 주인은 왜 딸의 두 손을 잘랐을까?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은” 예쁜 아기를 바라는 왕비와 오로지 질투심 때문에 딸을 살해하는 마녀가 알고 보니 사실은 같은 사람이라면? 사악한 계모가 정말 마녀라면 어째서 번번이 백설공주를 죽이는 데 실패할까? 왕자는 왜 하필 관 속에 전시된 죽은 여자에게 매혹되는가? ‘흰눈이’와 ‘빨간 장미’ 자매가 심술궂은 난쟁이를 세 번이나 구해주는 이유는 뭘까?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2》는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비약과 풀기 힘든 수수께끼로 가득한 그림 동화야말로 인간 심리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신화적 지혜의 보고임을 보여준다.
심층심리학적 동화 읽기의 대가인 오이겐 드레버만은 19세기 독일의 그림 형제가 옛이야기들을 수집해 엮은 ‘그림 동화(Grimms Märchen)’에서 인간의 내적 성장을 가로막는 무의식적 장애물을 발견하고, 나아가 그 벽을 뛰어넘는 경이로운 심리적 도약의 순간을 포착한다.
자식을 금기와 억압 속에 가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모든 욕망을 지워버린 소녀가 찾아가는 자기 발견의 길, 자식을 자기 삶의 거울로 여기는 나르시시스트 어머니 때문에 스스로 살아 있는 시체가 된 백설공주가 찾은 해방, ‘흰눈이’와 ‘빨간 장미’가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숙하기까지 내면의 ‘곰’과 ‘난쟁이’와 벌이는 한판 승부, 선한 사람은 불행하고 악한 사람은 잘사는 불의한 이 세계에 의문을 던지는 ‘골트마리’와 ‘페히마리’의 기이한 모험……. 성장을 가로막는 불안과 두려움의 족쇄를 풀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용기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숨겨진 마음의 비밀을 찾아가는 인문학적 사유의 매혹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히스테리… 그림 동화에서 찾은 무의식의 세계
30여 년간 심리상담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 온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 속 인물들인 공주와 마녀와 왕자에게서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불안과 두려움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현실의 인간을 발견한다. 까닭 모를 우울, 분노, 자책에 사로잡혀 타인과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공허한 삶을 살거나 억압 속에서 움츠린 채 살아가는 ‘나’와 ‘너’의 모습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드레버만은 프로이트와 융의 심층심리학을 통해 그림 동화가 아이들에게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을 위한 매우 정교한 심리 드라마’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우리는 동화 속 인물을 살아 있는 현실의 인간으로 만날 수 있다. 또한 저자가 직접 상담실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된다. 이제 나르시시즘이나 히스테리, 콤플렉스 같은 정신분석 개념들이 그저 이론적인 개념에 그치지 않고 복잡하게 엉킨 인간의 심리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림 동화, 인간 무의식의 지도
‘그림 동화(Grimms Märchen)’는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독일 지역에 전해 내려온 옛이야기들을 모아서 엮은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Kinder-und Hausmärchen)》라는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흔히 ‘동화’라고 옮기는 독일어 ‘메르헨(märchen)’은 ‘옛이야기’, ‘민화’, ‘동화’의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백설공주>, <라푼첼>, <빨간 모자> 등이 모두 그림 형제의 채집과 수록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옛이야기들이다.
두 사람 다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였던 그림 형제는 1807년부터 옛이야기를 수집해 1812년 12월에 86편의 이야기가 실린 1권을 펴냈고 뒤이어 1814년에 70편의 이야기를 담은 2권을 발행하였다. 이 1권과 2권을 합쳐 초판이라고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수정하면서 여러 차례 개정판을 냈다. 1857년에 200편의 이야기를 수록한 7판을 냈고 그 책이 최종판이 되었다.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시리즈는 최종판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그림 동화 같은 옛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대립과 갈등을 이야기”한다. 심층심리학적 동화 읽기의 선구자인 브루노 베텔하임은 《옛이야기의 매력》에서 “옛이야기에서는 존재의 불안과 어려움을 매우 진지하게 말해준다. 예를 들어, 애정에 대한 욕구,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불안감, 또 삶에 대한 애착이나 죽음의 공포 등을 직접 다룬다.”고 말했다.
(그림) 동화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험난한 길을 시간을 초월해 변치 않는 이미지로 서술한다. 그리하여 동화는 유년기의 흔적 탓에 삶에 끼어드는 고뇌와 곤경,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야 하는 고뇌와 곤경을 묘사한다. 동화는 어른의 자아가 치우치고 경직된 마음에서 어떻게 해방되어 자기 자신에게 이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동화는 불안과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이 올바르게 완성될 것이라 믿는 용기, 자기 마음의 진실을 조건 없이 따르는 용기를 전해준다. 그리하여 동화는 무의식의 이정표이자 무의식의 지도가 된다. 이것이 심층심리학이 동화를 선호하는 이유이다. - <손 없는 소녀>(11~12쪽)
따라서 그림 동화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읽을 때 한층 깊고 세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2》는 이러한 심리학적 동화 읽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그림 동화야말로 사랑과 미움, 불안, 두려움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와 삶의 본질에 관한 심오한 성찰이 담긴 인류 보편의 이야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고대 신화적 세계관의 기록
한편으로 그림 동화에는 세계의 탄생과 본질을 인간을 둘러싼 자연과 해와 달, 별을 통해 읽어내려 했던 신화적, 원시적 세계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옛이야기는 “고대 신화와 원시 부족의 민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간이 흐르면서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변모했지만 그 내용과 상징 면에서는 여전히 “자연의 거대한 모순과 운동이라는 설계도에 따라 인간 운명을 서술하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 설화, 자연 신화, 신학은 그림 동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손 없는 소녀>, <흰눈이와 빨간 장미>, <홀레 아주머니> 같은 동화에서도 천체와 자연에 대한 신화적 세계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의 세계관에서는 자연의 거대한 대립을 인격화하여 바라본다. 수많은 신화들이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북풍과 남풍을 성격이 아주 다른 자매로 그린다. ‘흰눈이’와 ‘빨간 장미’도 이러한 본보기에 어울리게 묘사된다. 활기 넘치는 성격의 빨간 장미가 여름, 꽃, 야외에서 하는 흥겨운 놀이를 좋아한다면, 겨울을 좋아하는 흰눈이는 대개 조용히 지내며 집안일을 많이 한다. 이러한 두 형상에는 거대한 두 계절에 대한 신화적 형상화가 여전히 뚜렷하게 살아 있다. - <흰눈이와 빨간 장미>(313쪽)
‘홀레 아주머니’라는 이름 자체가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는 징표다. 홀레 아주머니는 바로 게르만의 여신 홀다(Holda), 즉 ‘우아한 여인’ 또는 베르히타(Berchta), 즉 ‘빛나는 여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우물을 통해 하계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어머니 대지의 형상이 그녀 안에 계속 살아 있다. …… 종교사적으로 본다면 ‘홀다 아주머니’는 특히 독일 남부,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알자스, 슈바벤, 바이에른 지방에서 가정의 여신으로 섬겼다. - <홀레 아주머니>(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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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왜 딸의 두 손을 자르는가?
- <손 없는 소녀>, 아이가 어른이 되는 험난한 여정
<손 없는 소녀(Das Mädchen ohne Hände)>는 딸의 두 손을 자르는 아버지라는 무시무시한 내용 때문에 대표적인 잔혹 동화로 알려져 있다. 한 가난한 방앗간 주인이 얼떨결에 악마와 계약을 맺어 사랑하는 딸을 내주어야 할 상황에 놓인다. 소녀는 간신히 위기를 넘기지만, 화가 난 악마는 방앗간 주인에게 딸의 두 손을 자르라고 요구하고 악마가 두려운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자른다. 다행히 악마는 딸을 데려가지 못하지만, 딸은 스스로 집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손 없는 소녀’의 탄생 과정이다. 그 뒤로도 소녀가 진정한 행복을 찾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 동화는 아버지의 금기와 억압 아래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지워버린 한 소녀가 고통스런 심리적 극복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삶을 찾는 험난한 여정을 다루고 있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남자, 아버지의 정체
어리석게도 악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에 속아 계약을 하는 남자. 당연히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비난받는 사람은 아버지이다. 대체 얼마나 비정하고 비겁한 인간이기에 자기가 살려고 딸의 손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드레버만은 서두에서 아버지를 설명하는 단 한 문장, “어느 방앗간 주인이 점점 가난해져서 방앗간과 그 뒤쪽에 있는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을 통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실마리를 찾아낸다.
심리학의 눈으로 볼 때, 이 이야기에서 ‘악마’란 가난 때문에 사고와 감정이 왜곡된 상태를 가리킨다.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남자가 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고통을 받는다. 스스로 실패자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자기에게 의존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식구들이 없었다면! 구속 없이 자유롭다면! 그저 자신만 돌보면 된다면! 가족이 없다면 이 힘든 가난도 없을 텐데!” 아버지가 ‘원래’ 가족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없다면 악마에게 걸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동화에서 ‘악마’는 인물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가난과 궁핍에서 비롯하는 인간적 비극을 가리킨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착한 아이’의 탄생
그렇다면 아버지가 딸의 두 손을 자른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이런 상황에서 아내보다 더 짐스러운 존재는 자식이다. 아내는 허드렛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어린 자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아이가 아버지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욕구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뿐이다. 아이는 먹고 싶은 음식, 갖고 싶은 장난감, 하고 싶은 일을 말하지 않는다. 아예 마음속에서부터 지워버린다. 그리하여 동화 속에서 ‘두 손을 자른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강력한 심리적 억제, 즉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고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 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쥐지 못하도록” 손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소녀 앞에 나타나는 악마는 실은 벌컥 화를 내며 폭발하는 아버지 안에 깃든 악마적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동화는 소녀가 아버지를 완전히 분열적으로, 즉 반은 인간, 반은 악마로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소녀에게 인간으로 나타나는지, 악마로 나타나는지는 순전히 그녀 자신의 태도에 달린 것 같다. 아버지가 소녀에게 필사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소녀가 손을 자르는 데 동의하는 것이리라. 그러한 상황이라면 소녀가 자기 손을 자르는 데 동의해야만 아버지가 인간적 존재로 남는다. 그러지 않는다면, 만일 소녀가 손을 자르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녀에게 아버지는 악마처럼, 어떤 낯설고 무시무시한 힘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나타날 것이다. (32~33쪽)
두 손을 자른 소녀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착한 아이로 비친다. 이런 아이는 극도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지닌 어른으로 자라기 쉽다.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아버지에게 부담이 되었다는 죄책감, 언제 아버지가 ‘악마’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소녀의 성장기를 지배한다. 실제로 저자가 상담실에서 만난, ‘손 없는 소녀’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한 여성은 “주변 사람들이 불쾌해하거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지 눈치를 보는 끔찍한 준비 태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늘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불안에 쫓기고 몰리면서 사는 듯 보였다.”
‘손 없는 소녀’는 왜 왕을 떠나는가? - 아이에서 어른으로 도약하기
이야기가 중반에 이르면 아버지의 집을 떠난 ‘손 없는 소녀’가 사려 깊고 친절한 왕을 만나 결혼하고 행복을 찾는 듯 보인다. 왕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은으로 만든 손’까지 선물해준다. 실은 소녀가 스스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부터가 매우 바람직한 변화다.
소녀는 존재의 불구화에 너무 큰 고통을 받아 왔기에 이런 자기 억제에 적응하고 ‘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없다. 아버지가 아무리 사랑과 배려를 약속해도 자기 삶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는 세상으로 나가야 하고 자기 존재를 찾아 나서야 한다. (42쪽)
그러나 어린 시절에 각인된 죄책감과 불안에서 벗어나 진정한 어른이 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동화에서는 왕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소녀가 왕의 아들을 낳는다. 그런데 악마의 계략으로 다시 아이와 함께 궁전을 떠나 황야로 도망치게 되고, 그 후 7년이 흐른 뒤에야 왕과 소녀는 다시 만나게 된다. 소녀는 왜 왕을 떠나야 하는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소녀가 겪는 후반부의 이별은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대로 왕의 곁에 머물렀다면 결국 소녀는 내면의 죄책감과 불안 탓에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신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하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다만 사랑하는 여인이 자립적이고 독자적이 되는 일만은 이룰 수 없다. 그녀는 낙원에서 살지만, 주관적으로 언제나 왕이 자비롭게 거두어주고 용인해준 존재로 남는다. 두 사람 관계가 더 지속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관계 방식 때문이다. 방앗간 딸이 처음에 남편을 오직 아버지의 반대 형상으로만 생각했고, 이후 남편과의 관계가 유아적으로 감사하고 의존하는 태도 위에 세워졌기에, 아버지 탓에 생겨났던 어린아이의 불안과 죄책감이 그녀의 사랑 안으로 반드시 섞여들기 때문이다. (57쪽)
저자에 따르면, 손 없는 소녀가 아이와 함께 집을 떠난다는 설정은 고통스럽지만 바람직한 변화를 의미한다. 부부가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될 때 두 사람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아내가 아이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아직 아버지의 역할을 낯설어하는 남편과 관계가 멀어질 수 있다. 특히 동화 속에서처럼 아내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경우 자식에 대한 애착은 더욱 심해진다. “자신의 유년기가 없는 여자는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아이 안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발견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손 없는 소녀’는 이런 식으로 어머니가 되면서 남편과 더욱 멀어지고, 둘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머니의 공허한 삶을 느끼게 된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결속이 부족함을 느끼고 부모가 벌이는 ‘부부 전쟁’에 고통받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가 ‘아이’와 더불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집을 떠나 독립적 삶을 감행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때로는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주 용감하고 올바른 결정이다. 여성은 자신에게 허용하는 그만큼의 행복만 아이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68쪽)
7년이 흐른 뒤에 왕이 다시 아내를 만났을 때 그녀는 놀랍게도 가짜 손이 아니라 진짜 손을 가지고 있었다. 동화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손이 다시 자라났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한 여성이 마침내 자신의 욕구와 소망을 직접 ‘움켜쥐고’ 충족할 ‘손’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손 없는 소녀’는 이제 더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한 명의 여성으로, 어른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은 것이다.
어머니의 그림자에 갇히다
- <백설공주>, 불안과 두려움의 유리 감옥이 열릴 때
<백설공주(Schneewittchen)>는 오늘날에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동화이자 가장 사랑받는 동화이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해 내려왔는데, 그림 형제는 특히 ‘리칠데’ 전설을 저본으로 삼아 <백설공주>를 정리했다고 한다.
‘리칠데’는 <백설공주>에서 사악한 계모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리칠데는 마법 거울이 알려준 대로 ‘곰발트 백작’과 결혼하고자 한다. 유부남이었던 곰발트 백작은 최고의 미녀와 결혼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아내를 버린다. 결국 슬픔에 빠진 아내는 홀로 수도원에서 딸을 낳고 죽는다. ‘블랑카’라는 이름의 딸이 바로 ‘백설공주’에 해당한다. 리칠데는 결혼과 동시에 그의 딸 블랑카의 의붓어머니가 되고, 이후 <백설공주>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의붓)어머니와 딸의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드레버만은 ‘리칠데’ 전설을 통해 <백설공주>에 숨은 심리학적 상징과 비유를 더욱 풍부하게 풀어낸다.
심층심리학의 눈으로 들여다볼 때, <백설공주>는 평생 타인의 시선에 기대어 살아온 나르시시스트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딸이 겪는 발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자신의 분신인 딸을 사랑하고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무의식적으로 딸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질투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어머니. 이런 어머니 밑에서 딸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백설공주의 진짜 어머니는 누구인가?
동화와 신화에서는 ‘선한’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과 ‘악한’ 의붓어머니의 등장이라는 모티프가 매우 자주 나타난다. 저자에 따르면,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외적 사건이 아니라 딸의 곁에 있는 동일한 인물의 본질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백설공주>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알다시피, <백설공주>에는 두 명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며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은” 예쁜 아기를 바랐던 친어머니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안정을 찾지 못하는 사악한 계모. 그런데 아이를 간절히 바라던 어머니와 아이를 살해하기 위해 추적을 멈추지 않는 무시무시한 의붓어머니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드레버만은 백설공주의 두 어머니에게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여자를 발견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은 흔히 자신과 다른 존재인 자식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 마음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이 놓여 있다. ‘자신에 대한 불안’은 나르시시즘과 뒤틀린 자기애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을 확인받는 공허한 삶에 빠져드는 것이다. “자기 삶에 아무런 가치와 권리가 없다는 감정에 시달리며 오로지 자신의 ‘아름다움’에서 위안을 받는 여자”가 바로 백설공주의 어머니이다.
끊임없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나르시시즘적 자기 탐닉과 자기애의 전형이 된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욕망, 흠 없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워야 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는 광기에 빠져든 그녀는 언뜻 신들린 사람처럼 보인다. 유일성과 배타적 가치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意志)도 깊은 열등감이라는 배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121쪽)
거울! 흔히 거울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사유하는 일을 상징한다. 그러나 백설공주의 (의붓)어머니에게 거울은 자신의 가치와 무가치, 존재와 비존재를 두고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실험이 벌어지는 장소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판결이 거듭해서 내려지는 장소로서 거울, 한 사람의 본질이 다시 살아나느냐 처형되느냐가 결정되는 무대로서 거울인 것이다. (132쪽)
어머니는 왜 딸이 죽기를 바라는가?
이렇게 거울 앞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여자에게 자식은 어떤 의미일까?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신체의 변화를 겪게 된다. 따라서 “아이를 간절히 바랐던 만큼이나 이제 아이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이제 아이에게 어머니로서는 ‘죽고’ 거울 앞 여인으로 변신하는 일이 시작된다.” 출산과 양육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이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는 여성들은 많다. 그러나 아이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의 실패한 삶을 딸이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한 여자가 (의붓)딸을 오로지 딸의 아름다움 때문에 치명적으로 질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전체적으로 보면 백설공주의 삶에서 첫 시기(동화에서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긍지와 기쁨을 품고 있는 이 시기에는 그래도 어머니가 백설공주를 ‘원하던 아이’이자 자신을 빛내줄 ‘선전용 아이’로 애지중지 키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딸이 차츰차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자기 삶을 살기 시작함을 어머니가 깨닫는 때가 온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백설공주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을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딸이 독자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이제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처절한 추적자로 변신할 것이다.”
백설공주를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가는 것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갈등이나 명확하게 표현되는 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감춰진 질투가 백설공주의 삶에 천천히 독을 타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설공주가 어머니를 실망시켰다거나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점점 어머니가 원했던 바로 그대로 되기 때문이다. 백설공주가 어머니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되면서도 실존적으로 다른 여자가 된다는 사실 때문에, …… 백설공주는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행동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먼 희생자가 된다. (166쪽)
“공주를 죽이고 간과 허파를 가져오너라.”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바로 사악한 왕비가 사냥꾼이 가져온 딸의 허파와 간(실은 산돼지의 허파와 간이었지만)을 먹고 흡족해하는 부분일 것이다. 저자는 계모가 “간과 허파”를 먹는다는 식인 모티프에서 어머니에게 짓눌린 딸의 심리 상태를 읽어낸다. 즉 이 모티프에서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고 뒤얽혀 있기에 어머니에게 삼켜진 느낌을 받는 아이의 체험”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어머니는 말 그대로 아이의 존재를 먹어버린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아이에겐 자신의 느낌, 생각, 존재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백설공주의 무시무시한 (의붓)어머니가 먹은 간은 태고부터 감정이 들어 있는 곳,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지극히 공격적인 감정이 들어 있는 장소로 여겨졌다. …… (의붓)딸의 간을 먹는 어머니는 특히 소녀의 어머니에 대한 어떠한 항의, 비판, 저항도 그 싹에서부터 꺾어버리는 관계를 상징한다. 어머니 앞에서 자기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무거운 죄책감의 압력 때문에 반항의 싹이 아예 무의식적으로 억압된다. (181쪽)
왜 하필 난쟁이의 집인가?
사냥꾼의 손에서 풀려난 백설공주가 산 위에 있는 난쟁이들의 집에서 지낸다는 설정을 두고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장면을 정반대 의미로 본다. 백설공주의 도주는 어머니로부터 외적인 분리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주에게 중요한 것은 내적인 해방과 성장이며, 난쟁이 집은 정신의 ‘퇴행’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백설공주가 ‘저녁’에 도착하는 깊은 ‘숲’ 속의 ‘난쟁이 집’을 공간적으로 다른 곳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소녀가 자기 삶에서 새로 찾은 ‘입지’라고 이해해야 비로소 이야기 전체에 깃든 본래의 긴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백설공주는 어머니 곁에서 마치 난쟁이 집에 있는 듯 그렇게 느낀다! 아이는 처형당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적응해야 한다! 아이는 모든 소망을 난쟁이 크기로 축소해야 왕비의 그림자 아래서 (적어도 당분간은) 살아남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난쟁이 집’으로의 도주는 불안으로 인해 어머니 세상에 새롭게 적응하는 방식일 뿐이고, 어머니의 보호(혹은 지배) 아래 영원히 소녀로 머물려는 소망일 뿐이며, 강요로 인해 성숙을 향한 갈망을 포기하는 것일 뿐이다. (196~197쪽)
‘난쟁이의 집’은 딸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의붓)어머니의 세계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일 뿐이며, 난쟁이의 집에서 지내는 백설공주는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에게 순종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난쟁이 집’에서의 삶은 ‘선한 어머니’, ‘거울 앞 여인’의 ‘위대함’을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결코 성장하지 않겠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사악한 왕비는 왜 단번에 백설공주를 죽이지 못할까?
사악한 왕비가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세 번에 걸쳐 찾아가는 과정은 여러 가지 논리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왕비가 정말 마녀라면 왜 단번에 공주의 목숨을 끊어놓지 못할까? 궁정에 단번에 사람을 죽일 만한 재료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왜 하필 허리띠나 머리빗 같은 도구를 쓸까? 사실 이 모든 설정은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더없이 정교한 짜임새를 지니고 있으며 대단히 현실적인 서술이다. 백설공주는 여성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허리띠’ 때문에 ‘질식’하고, 어머니가 백설공주 머리카락을 가장 아름답게 다듬어주려는 빗에 치명적으로 ‘중독’된다. 이것은 곧 성숙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딸에게 느끼는 질투와 거기서 비롯된 여성성에 대한 처벌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거듭 칭찬한다. 어머니는 나아가 여성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몸을 여자로서 가장 보기 좋게 끈으로 동여매고 타인에게 내보이는 법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이 일은 실제로는 소녀를 꽁꽁 묶어 숨을 못 쉬게 하고 꽉 죄는 코르셋으로 질식시키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머리카락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내보일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지만, 딸에게 여성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빗에는 사실 치명적인 독이 칠해져 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딸을 사랑을 마음껏 누리도록 유혹하지만, 유혹의 ‘과일’ 절반에는 독이 들어 있고 그것도 바로 가장 먹음직스러운 빨간 부분이 그렇다. (212쪽)
안에서만 열리는 유리 관
백설공주 이야기를 처음 듣는 아이는 백설공주가 번번이 변장한 계모에게 문을 열어주는 부분에서 경악하고 화를 낸다. “착한 난쟁이들이 되풀이해서 충고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건성으로 흘려들을 수 있을까?”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백설공주에게 어머니의 행동을 판단할 만한 능력도, 거부할 만한 능력도 없음을 의미한다. 백설공주는 도망치고, 후퇴하고, 아무 저항 없이 독사과를 먹는다. 독사과를 먹고 숨이 끊어진 뒤 유리 관 속에 누워 오랜 세월을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림 동화는 딸의 모든 감정과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는 어머니의 그림자 속에서 이어가는 삶을 유리 관 속의 삶이라는 상징으로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표현한다. 유리 관 속에 진열된 살아 있는 시체의 삶은, 딸이 어머니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체념하고 어머니에게 복종하는 것, 그리하여 매사에 무관심한 태도를 생존 전략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때 백설공주에게 ‘유리 관’이 ‘생존’을 위한 최후의 피신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은 백설공주는 왕비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유리 관’은 어머니의 ‘허영심’이 딸에게 제시하는 두 가지 모순된 요구 사이에서 유일하게 남은 타협을 상징한다. 한편으로는 딸이 어머니의 화려함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스스로를 진열해야 한다는 요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더라도 이러한 역할 속에서 그러한 자세로 모든 사람의 눈앞에 정말로 팔려고 내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요구다. (242쪽)
그러면 백설공주에게는 희망이 없는가? 월트 디즈니 사에서 만든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는 백설공주에게 왕자가 입맞춤을 하는 순간 공주가 눈을 뜬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 동화와 완전히 다른 설정이다. 실제로 그림 동화에서는 왕자의 하인들이 관을 들고 가던 도중 덩굴에 관이 걸려 흔들리는 순간 백설공주가 먹었던 독사과 조각이 목에서 튀어나온다. 그리고 눈을 뜬 백설공주가 “스스로”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나 앉는다. 이 부분이 바로 백설공주가 삶으로 깨어나는 순간이며, 백설공주 같은 여성의 심리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의 순간을 상징한다.
백설공주가 죽음으로부터 깨어나는 일은 오로지 어머니와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을 이겨내고 어머니의 강박에서 풀려날 때에만 가능하다. 이때 결코 다른 사람이 유리 관을 밖에서 강제로 열어서는 안 된다. 심리적인 차원에서 유리 관은 생존을 위한 은신처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선의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타인이 관을 열었다가는 공주가 내적으로 분열되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백설공주>의 왕자는 다르다. 그는 백설공주를 오로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들고 존중하겠”다고 말한다.
왕자는 ‘하인들’에게 ‘죽은’ 공주를 ‘어깨’에 메고 가도록 한다. 이렇게 말해보자. 백설공주와 왕자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백설공주를 ‘지지’하려는 의지, 즉 ‘어깨’는 아니더라도 ‘손’으로 받치려는 의지로 규정된다. 이처럼 지극히 신중하고 배려하는 관계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나쁜 말을 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훈계하지 않고 성급함을 보이지 말라. (275쪽)
현실에서라면 독사과가 튀어나오는 것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치명적인 감정을 눈물이나 울분으로 토해내는 것,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백설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통해 “완전히 ‘받아들여진다는’ 감정”을 느낄 때에만 독사과를 토해내고 관을 열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평생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갈등을 회피하거나 침묵하며 살아온 여자라면 단번에 완전히 해방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금씩 어머니의 독사과에서 벗어나며 자신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림 형제는 왕자와 공주가 모든 장애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왕자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왕자의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흰눈이와 빨간 장미>, 소녀는 어떻게 여자가 되는가?
<흰눈이와 빨간 장미(Schneeweißchen und Rosenrot)>는 ‘흰눈이’와 ‘빨간 장미’라는 성실하고 예쁜 자매가 자애로운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낙원 같은 세계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숲에 사는 동물들과 천사가 자매를 보호해준다. 자매는 겨울에 숲에서 온 ‘곰’과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동화에도 갈등이 존재하는데, 바로 자매가 심술궂은 난쟁이를 만나는 장면이다. 난쟁이는 자신을 세 번이나 구해준 자매에게 배은망덕하게 굴다가 결국 곰의 발에 채여 죽는다. 알고 보니 곰은 못된 난쟁이의 마법에 걸린 왕자였다. 흰눈이는 왕자와 결혼하고 빨간 장미는 왕자의 형제와 결혼한 뒤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동화는 끝이 난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전형적인 어린이용 동화로 보인다. 많은 그림 동화가 잔인한 내용 때문에 아이들에게 부적합하게 보이는 데 비해, 이 동화는 적어도 도입부와 발단 부분에서는 한없이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심층심리학의 눈으로 볼 때, 이 동화는 사춘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성장 과정을 다루고 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 동화는 “어떻게 소녀는 자기 안에서 단절을 겪지 않으면서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혹은 거꾸로 어떻게 여성은 사랑 안에서 유년기의 감정과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소녀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곰’, 무의식의 어두운 숲에서 나온 충동
<흰눈이와 빨간 장미>의 핵심 주제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길, 소녀가 여자가 되는 조화로운 성장의 길’이다. 성장 과정에서 도약할 것인지 아니면 정체하거나 퇴행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곧 ‘곰’과 ‘난쟁이’를 어떻게 만나고 다룰 것이냐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 동화에서 ‘곰’은 심리학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나타나는 ‘충동’을 의미한다.
이 동화는 곰을 ‘길들이는 일’, 즉 성적 충동의 에너지를 점진적으로 ‘길들이는 일’을 상세하고도 적절하게 서술한다. 이는 원래 온순한 곰을 아이들이 위험한 괴물로 보게 만드는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 …… 곰이 은밀히 악의를 품지 않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피해 몸을 녹이려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자마자 곰을 둘러싼 흥분은 곧 사라진다. 곰은 처음 깨어나는 충동이 지니는 소망을 상징하고 남성적 세계의 갑작스런 침입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는 흰눈이와 빨간 장미의 세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파괴를 가져오지 않는다. (345쪽)
한겨울 동안 자매의 집 안에서 추위를 피하던 곰은 봄이 오자 숲으로 떠난다. 이것은 내면에서 새로 깨어난 충동을 적절하게 다루려면 당분간 금욕의 시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난쟁이’, 어린아이의 도덕 관념 혹은 감시하는 초자아
곰과 이별한 뒤에 ‘난쟁이’가 등장한다. 동화에 따르면, 곰은 난쟁이들의 마술 때문에 곰이라는 가면 속으로 유형당한 왕자였다. 왕자가 본 모습을 되찾으려면 난쟁이가 죽어야 한다. “이 관계에 따르면, 난쟁이와 곰은 신비스러우면서도 서로 모순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속한다. 둘은 서로를 규정하고 서로 투쟁하며 함께 파멸해 간다.” 대체 이 이상한 난쟁이는 누구란 말인가?
기본적으로 난쟁이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온갖 장애를 동반하는 심리적 태도, 어린아이의 도덕관, 혹은 늘 감시하고 비판하는 초자아를 상징한다. 어린아이의 도덕, 초자아는 소녀가 성인으로 나아가는 성장의 길목에서 충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소화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곤 한다. 만약 그 초자아의 비난하는 눈길에 굴복하게 되면 죄책감과 불안을 떠안은 채, 내적으로 온전히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아이들은 어른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자신을 말 그대로 쏘아보는 표독스러운 눈에 의해 관찰당하고, 끈질기게 으르렁대는 비난의 목소리에 뒤덮인다고 거듭해서 느낀다. 원래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편협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특이하게도 이런 죄책감은 거기 굴복할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 아무리 시종일관 착한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러한 왜소한 인간성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이때 물론 ‘난쟁이 자아’는 소중한 보물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보물은 눈에 띄자마자 곧 다시 빼앗기게 된다. (355~356쪽)
자매가 난쟁이를 만날 때마다 그는 생명의 위험에 빠져 있다. 그리고 소녀들은 난쟁이가 배은망덕하게 행동하는데도 거듭 그를 ‘곤경’에서 구해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저자는 성장의 길 위에서 아직 “난쟁이라는 존재가 소녀들에게는 한동안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난쟁이와 곰 사이에서, 즉 어린아이의 도덕과 어른의 사랑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이 정말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최후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순간이 올 것인데, 그 전에 너무 일찍 아이의 양심이 죽어버린다면 그들도 크게 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곰이 난쟁이를 물리치는 순간이 온다.
<홀레 아주머니>, 불의한 세계를 견디며 살아가는 법
계모에게 차별과 학대를 받으며 사는 소녀가 있었다. 늘 부지런하고 성실한 소녀는 어느 날 실수로 우물에 물렛가락을 빠뜨리는데 냉혹한 계모는 소녀에게 우물로 들어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오라고 한다. 우물 속으로 뛰어든 소녀는 낯선 세계에서 ‘홀레 아주머니’를 만난다. ‘홀레 아주머니’는 성실하게 집안일을 도와주는 소녀에게 황금으로 온 몸이 덮이는 상을 준다. ‘황금 아가씨’가 된 소녀가 지상의 집으로 돌아오자, 의붓어머니는 자신의 못생기고 게으른 딸도 행운을 얻게 해주려고 우물 속으로 내려 보낸다. 그러나 게으른 딸은 ‘홀레 아주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온 몸에 역청이 덮이는 벌을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홀레 아주머니(Frau Holle)>의 줄거리이다. 그림 형제는 두 소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독일의 작가이자 민담 수집가인 루트비히 베히슈타인은 《독일 민담집》(1857년)에서 두 소녀를 각각 ‘골트마리(황금의 마리)’, ‘페히마리(역청의 마리)’라고 이름 지었다.
왜 선한 사람은 불행하고 악한 사람이 잘사는가?
언뜻 보기에 단순한 교훈담으로 보이는 <홀레 아주머니>에서 드레버만은 한 인간의 ‘성숙’과 ‘자기 발견’이라는 주제를 발견한다. 하지만 다른 동화들과 달리 이 동화는 심리학적 차원에서 어린 시절에 무의식에 새겨진 불안과 억압, 그로 인한 성장의 장애와 극복이라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홀레 아주머니>는 철학적이고 종교적 차원에서 ‘성장’의 문제를 다룬다. 즉 이 동화에서 보여주는 ‘내적 성장’은 “불의한 이 세계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사유하는 사람에게 가능한 성장이다. 동화는 도입부에서부터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품어 온 의문을 던진다.
세상에는 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성실함이라는 미덕과 게으름의 극단적 대립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를 옳다고 전제한다면) 도입부가 우선 관찰자에게 보여주듯이, 선함이 ‘의붓어머니에게 다루어지듯이’ 잔인하고 부당하게 대접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화는 또 묻는다. 왜 이 세상에서는 자주 나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고 좋은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흔히 곳곳에서 보는 명백한 불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388~389쪽)
게으름은 왜 악인가? - 선과 악에 대한 특별한 시각
옛이야기들에서 곧잘 ‘아름답고 착한 아이와 못생기고 심술궂은 아이’라는 식의 구도를 곧잘 볼 수 있다. 내적 본성, 즉 영혼이 겉모습으로 그대로 드러난다는 원시적 사고방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홀레 아주머니>에는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선과 악을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대립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 속에서 ‘선’을 상징하는 ‘골트마리’는 어둠과 악에 맞서는 용사가 아니다. 그저 부지런하고 성실할 뿐이다. ‘악’을 상징하는 ‘페히마리’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못된 짓을 하거나, 세상을 타락으로 빠뜨리는 사악한 원리를 상징하지 않는다. 다만 게으를 뿐이다. 왜 게으름이 악일까?
민중 신화들에서 악이 의식적으로 행위하고 파괴하는 자로 생각되지 않고, 다만 꾸물대는 자, 활동하지 않는 자로 여겨지고, 운동에 저항하는 중력의 무게,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선미의 소용돌이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잖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전체의 운동에 기여하고 그 자체로는 결코 악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경직성과 부동성은 참으로 악한 것이다. 특히 천체와 관련해서 (예를 들어 아스텍의) 신화에서는 태양의 운행이 멈춰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가장 큰 공포를 자아낸다. 게으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수동적 거부가 가장 깊은 근본악으로 이해되고, 반대로 부지런함, 내적 참여와 능동성, 운동은 선의 특징으로 받아들여진다. (415쪽)
‘골트마리’가 황금에 뒤덮인 채 지상에 돌아온 뒤 ‘페히마리’는 황금이라는 행복을 얻기 위해 짐짓 골트마리를 따라한다. 그러나 자신의 본질을 가리려던 거짓은 끝내 정체를 드러낸다. 결국 검은 역청으로 뒤덮이는 ‘페히마리’의 불행은 순전히 자신의 게으름과 거짓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저자는 <홀레 아주머니>의 결말을 “선이 진정 부러워할 만한 가치가 있고 행복한 것이며, 악은 자기기만의 가련한 희생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악의 불행은 정말로 그의 본질에서 나온다. …… 어떤 의미로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와 편안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오며, 말 그대로 본질적 거부, 즉 ‘게으름’에서 나온다. <홀레 아주머니>에 따르면 악은 오로지 내적으로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피상적 방식으로 따라 만들려는 가식적 노력으로 나타난다. 늘 ‘마치 그런 척’ 행동할 뿐, 선의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즉 불안과 절망, 곤경과 체념, 자신에게 충실하고 이 세계의 사물에 이바지하려는 사심 없는 순종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은 결국 공허하고 덧없다. (453쪽)
지은이*옮긴이
오이겐 드레버만(Eugen Drewermann)
독일의 신학자, 평화운동가, 심리학자. 독일은 물론이고 전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신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40년에 도르트문트 인근 베르크카멘에서 태어났다. 철학, 신학,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1966년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신부이자 정신분석가로 활동하면서 1979년부터 파더보른의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비교종교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드레버만은 성모 마리아의 처녀 수태, 예수의 부활 등 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축자적인 성서 해석을 비판하면서 성서를 상징과 비유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가톨릭 교리에 관한 드레버만의 논쟁적인 견해는 로마 교황청의 우려를 샀다. 결국 가톨릭 지도부는 1991년에 대학에서 강의를 금지한 데 이어 1992년에 그를 신부직에서 파면했다.
평화운동가로서 드레버만은 걸프전과 이라크전쟁을 비롯해 독일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2002년에는 달라이 라마와 종교간 소통을 주제로 한 공동 저작을 내기도 했다. 2007년에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에리히 프롬 상’을 수상했고, 2011년에는 인도주의와 환경 문제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상’을 받았다.
드레버만은 1992년부터 저술과 강연, 심리 상담에 힘쓰고 있으며, 현재까지 80여 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그의 저술은 1990년대 초에 벌써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전 세계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중에서도 그림 형제의 동화 20여 편을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시리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 심리학과 철학과 신학을 넘나드는 탄탄한 지적 기반이 어우러진,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울리는 보기 드문 인문서로 호평을 받았다.
김태희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본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독어학을 공부한 뒤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서울대, 한신대 등에서 현대 서양 사상, 윤리학, 인식론, 현상학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박완서 기금’ 연구 펠로우,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일반 연구원, 철학사상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 례
∽ 손 없는 소녀 ∽
•들어가는 글 _ 아이가 어른이 되는 험난한 여정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아버지는 왜 딸의 두 손을 자르는가? - “방앗간 뒤에 있는 것을 준다면 부자로 만들어주겠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착한 아이’ -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제 팔을 자르세요.”
자기 존재를 찾아 나서다 - “소녀는 잘린 팔을 등 뒤에 묶고 떠났습니다.”
금지된 것을 위반하는 용기 - “소녀는 왕의 정원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소녀는 왕과 왜 헤어지는가? -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비로소 진정한 왕비가 되다 - “왕은 7년 동안 아내를 찾아 헤맸습니다.”
∽ 백설공주 ∽
•들어가는 글 _ 죄와 불안의 유리 감옥이 열릴 때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금지된 소망, 얼어붙은 삶 -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은 아이가 있다면”
거울 앞에 선 나르시시즘 -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어머니는 왜 딸이 죽기를 바랄까? - “왕비는 시기심으로 낯빛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젊음에 대한 치명적인 질투 - “공주를 죽이고 허파와 간을 가지고 오너라.”
남자, ‘사냥꾼’ 혹은 ‘푸른 수염’ - “사냥꾼이 칼을 꺼내 백설공주의 가슴을 찌르려고 하자…”
움츠린 자아, 퇴행하는 정신 - “백설공주는 난쟁이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처벌당하는 여성성 - “이리 와보렴. 네 허리를 제대로 죄어주마.”
유리 관 속의 공주 - “공주는 아주 오랫동안 관에 누워 있었습니다.”
왕자는 왜 죽은 여자에게 매혹되는가? - “백설공주를 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안에서만 열리는 관 - “공주가 먹은 독사과 조각이 튀어나왔습니다.”
처벌하기와 용서하기 - “왕비는 죽을 때까지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 흰눈이와 빨간 장미 ∽
•들어가는 글 _ 동화, 의식의 근원으로 가는 통로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어머니 대지’의 선한 아이들 - “한 아이는 ‘흰눈이’, 다른 아이는 ‘빨간 장미’라고 불렀습니다.”
불안과 분열 없는 성장 -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내 안의 ‘곰’과 만나기 -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는 해를 끼치지 않아요.”
감시하는 초자아, 비난하는 난쟁이 - “난쟁이는 소녀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난쟁이를 구해주는 이유 - “이 돼먹지 못한 것들, 이 자랑스런 수염을 자르다니!”
털가죽을 벗는 왕자 - “황금 옷을 입은 멋진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 홀레 아주머니 ∽
•들어가는 글 _ 불의의 세상을 견디며 사는 법
•동화 읽기
•심층심리학적 해석
악한 자의 행복과 선한 자의 불행 - “엄마는 못생기고 게으른 딸을 훨씬 더 사랑했습니다.”
죽었다가 삶으로 떠오르는 ‘해의 소녀’ - “꼬끼오. 우리 황금 아가씨가 돌아왔어요.”
게으름과 부지런함, 아름다움과 추함 - “소녀는 실을 너무 많이 자아서 손가락에서 피가 났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다 - “소녀는 불안에 떨며 우물로 뛰어들었습니다.”
‘해의 소녀’는 왜 돌아오는가? - “집에 가고 싶어 슬퍼졌어요.”
게으름은 왜 악인가? - “역청은 게으른 소녀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 주석
• 그림․사진 해설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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