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은 왜 불안에 떠는가? 일본의 내면은 왜 분열되어 있는가? 그들이 내세우는 평화주의는 왜 자기 기만적인가? 일본 좌파를 과격화와 자멸로 이끈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작은 나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큰 나라, 평화헌법으로 무장한 호전적인 군사대국, 피해자 심리에 빠진 기묘한 가해자 국가……. 전후 일본 사회를 연구해 온 일본 현대사 학자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집단 심리를 ‘분열’, ‘트라우마’, ‘자기 기만’, ‘불안’이라는 네 가지 사회심리적 코드로 해독한다.
극우 지식인들에게 환호한 일본 좌익 학생 운동의 자기 분열적 행보, 한반도를 ‘일본을 향해 돌출한 흉기’로 인식하는 우익 히스테리,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 사건에 묻어버린 조선 식민 지배와 난징 대학살의 역사, 전 세계 평화 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면서 침략과 전쟁을 지워버리는 자기 기만…….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일본 사회의 표면을 걷어내고 내면의 심리를 들여다본다. 이 책은 일본의 집단 무의식이 표출된 사건들, 현상들, 일화들을 소재로 삼아 그려낸 일본 정신의 단면도이며 일본 사회의 해부학이다.
간 나오토 총리 사과 담화에 담긴 기만성
2010년 8월 10일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가 한국인들에게 과거 식민 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해방 65주년이 되는 8월 15일과 한일 강제 병합 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8월 22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강제 병합의 불법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같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야노 히데키 ‘강제 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사무국장은 8월 12일 한국실행위원회에 보내온 의견서에서 “(간 총리의 담화는) 식민 지배에 의해 한국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표기하는 데 머물러 그 식민 지배의 주체가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회피하고 있다”며 “(식민 지배의) 주체를 빠뜨린 이런 표기는 일본의 책임을 애매하게 하는 것으로 지난 1995년의 무라야마 총리 담화보다 후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사과를 하면서도 식민 지배의 주체로서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의 태도는 전쟁의 가해자이면서도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의 피해자 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분열적이고 기만적인 심리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1945년 패전 후 평화․민주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일본의 집단 멘털리티를 해부해 일본에서 급속하게 진행 중인 우경화 현상과 비틀린 역사 의식의 원인을 찾는다.
일본 우경화의 뿌리는 ‘불안’이다
몇 년 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일본의 우파 단체가 만든 역사 교과서가 한반도를 ‘일본을 향해 돌출한 흉기’라 표현한 적이 있다. 검정 과정에서 ‘흉기’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아 ‘팔뚝’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과거에 “일본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칼날”이라는 더욱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팔뚝’은 한결 순화된 표현이다. 하지만 ‘칼날’이 ‘흉기’가 되고 그것이 다시 ‘팔뚝’으로 순화되었다고 해서 이웃 나라를 표현하는 용어로 그리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에 큰 차이는 없다. ……
그렇다면 반대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일본은 한반도에게 무엇이었는가? 전근대 시대는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19세기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 ‘흉기’였다. 가능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서 ‘흉기’였다. 더구나 이는 일본의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괴롭혔던 ‘칼날’을 거두어들인 것은 스스로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적으로 일본에 ‘흉기’가 된 적이 없는 한반도를, 주체적으로 한반도에 ‘흉기’가 되었던 일본이 21세기에 와서도 한반도를 ‘흉기’라 표현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_‘머리말’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도 자각도 없이 오히려 한반도를 ‘흉기’라 표현하는 일본 우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나타난 일본의 우경화 흐름이 운동이나 사상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제도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 왜곡 교과서의 검정 통과, 독도 영유권 주장에 더하여 자위대의 국외 활동에 대한 법적 족쇄도 대폭 완화되었다. 이제 군사 무장을 금지하는 ‘평화헌법’만 개정하면 명실상부한 군사 대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군국주의의 부활과 국가주의의 강화를 주장하며 세력을 키워 가는 일본의 우익 세력. 저자는 이러한 급속한 우경화 뒤에 감춰진 일본의 ‘불안’ 심리를 지적한다.
일본은 왜 불안한가? 패전 후 1946년에 공포된 ‘평화헌법’으로 일본은 전쟁과 군대가 없는 ‘현실적’ 평화를 얻었다. 그리고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통하여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또한 한국을 포함한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친미 반공 군사 독재정권도 일본 전후 평화 체제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주변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되면서 군사․외교적으로 무방비 상태인 ‘안보 소국’ 일본은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한반도 분쟁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더욱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와 핵실험 등은 일본이 침략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불을 질렀다. 일본 우익은 그 불안을 국민적 불안으로 확산시키면서 군사력 증강과 안보 대국화에 대한 일본 사회 전반의 동의를 끌어냄으로써 우경화를 획책하고 있다.
일본 평화주의의 기만적 실체를 읽는다!
2009년 9월 총선에서 54년간 장기 집권해 온 자민당이 참패하고 민주당이 정권을 넘겨받았다. 우경화 행보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바람이 일부 수렴된 결과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한다는 우경화 이전, 즉 패전 이후 일본 전후란 어떤 공간인가? 과연 돌아가기를 꿈꿀 만큼 평화로운 공간인가? 저자는 가해와 피해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상태에서 모든 역사적 과실을 덮어놓은 채 전쟁 없는 평화만을 말하는 일본의 자기 기만적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일본의 전후 평화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규범적 가치, 명분으로서 평화를 뛰어넘어 이를 ‘평화주의’로 현실화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전쟁과 무장을 포기하는 헌법 9조와 핵무기 제조와 반입을 금지하는 비핵 3원칙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후 평화주의가 비무장 평화로 일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평화헌법과 자위대가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러한 일본 평화주의가 지닌 한계를 제대로 보려면 과거의 경험, 즉 식민 지배, 전쟁, 피폭 체험과 일본의 전후 평화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1953년에 일본 국회는 도쿄 전범재판의 판결을 무효화하면서 전쟁 범죄자 사면을 결의했다. 이 결의는 일본이 자랑하는 전후 민주주의가 미국이라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었다. 또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체험을 내세워 전쟁 침략자로서의 기억을 지우고 세계 평화 운동의 중심에 서는가 하면, 국적에 따라 피폭 보상 제도에 차별을 두는 데서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한계가 드러난다.
“도쿄 북쪽에 자리한 ‘군마 현 원폭 피재자 모임’의 스도 요시히코는 2005년에 현 내에서 열린 전몰자 위령식에서 나가사키 피폭 체험을 들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야스쿠니 문제나 헌법 문제는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 자신이 왜 피폭을 당했고, 피폭 후에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런 고통이 세계 각지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이니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문제의 배제란 또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 피폭 체험은 1945년 8월 9일에 정지되어 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없다. 오직 순간의 사실만이 피폭 체험이다. 피폭을 가져다준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고 그 전쟁을 결행한 최고 권력자인 천황이 그 후 피폭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그리고 피폭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전쟁을 찬양하는 야스쿠니 신사가 피폭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과 같은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다. …… 피폭 경험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 3장 ‘자기 기만’ 302~304쪽.
일본이 말하는 ‘평화’의 허구성은 ‘책임’을 부정하는 일본의 비틀린 과거 인식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56년에 일본의 경제기획청은 ‘전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전후란 ‘어둠의 시대’였던 전시(1937년 중일전쟁 이후 1945년 패전까지)를 지나 전쟁의 폐허로부터 회복하는 기간이나 과정을 뜻한다. 중요한 점은 일본이 생각하는 어둠의 시대에 메이지 유신 이후 부국강병과 패권주의 정책 아래 이루어졌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 침략 등은 빠져 있다는 것이다. 타이완과 조선의 식민지화, 괴뢰국가 ‘만주국’의 건설은 어둠의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제기된 ‘종군 위안부’ 문제 등은 1956년에 일본이 이미 끝났다고 선언한 ‘전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에서는 미 군정기에 매듭을 지었다고 생각한 전범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일본의 전후나 그 이후의 ‘번영’이 실제로는 “끝나지 않은 전후”를 “끝났다”고 결론 내림으로써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문제 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 나라의 ‘쇳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모든 것이 이 ‘쇳덩어리’를 잠깐 숨겨주었던 도금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 1945년 패전은 민주주의와 평화주의 헌법을 가져다주었지만, 이 나라의 ‘쇳덩어리’에 본질적 변화는 없었던 것이리라. 지금 다시 전쟁과 차별의 시대가 오고 있다.”
(2004년에 창간된 잡지) <젠야(前夜)>의 언급은 2000년대 이후에 일본 사회에서 급격하게 진행된 우경화를 경고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경화 이전, 즉 평화와 민주주의의 전후 혹은 포스트 전후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젠야>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의 목적은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도금’에 가려져 있던 일본의 전후가 과연 어떤 사회였는가를 밝혀내는 데 있다. ― 들어가는 글․24쪽에서
주요 내용
1장 분열
일본 좌파는 왜 몰락했을까? 일본 좌파는 1960, 1970년대 이후 극심한 내부 분열과 대립에 휩싸였다. 더구나 이 과정은 이론
투쟁에 그치지 않고 증오와 살육을 동반하였다. 이로써 좌파는 사회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이념적 영향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운동의
단절을 초래했다.
최
근 조사에 따르면 ‘우치게바’로 인한 폭력 사건만 1969~1999년 사이에 무려 1,960건, 사망자 113명, 부상자
4,600명에 이르렀다. 그것도 우발적인 충돌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인 경우가 많았다. 1972년 극좌
혁명 세력인 연합적군은 무장 투쟁을 위한 산악 훈련 중 14명의 동료를 ‘내부 공산주의화의 순화’라는 이유로 살해했다.
1973년 12월의 성명문은 당시 상대방에 대한 증오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반혁명분자는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 …… 필사적으로 밖으로 도망가려 했다. …… 동지의 목숨을 빼앗은 저주스러운
학살자의 손과 팔을 자르고 머리, 팔, 그리고 전신에 혁명적 죄과에 걸맞게 망치로 50발을 꼼꼼하게 각인했다. …… 현관으로
과감하게 들어간 우리 부대는 ……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며 창문으로 도망가려 하는 XX에게 강력하게 망치로 한방을 가했다.
방바닥에 나뒹굴어 우리 영웅적 부대의 진격에 겁에 질려 있는 가족 앞에서 모든 힘을 모아서 용서 없는 철퇴를 전신 모든 곳에 가해
피바다에 침몰시켰다.” - 일본 좌파는 왜 몰락했는가․50쪽
특
히 일탈적이고 급진적이었던 일본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가 ‘와다쓰미 상’을 파괴한 사건은 좌파 운동에 동조하는 세력까지 등을
돌리게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징물로 만들어진 ‘와다쓰미 상’을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전쟁 책임을 면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기고 파괴한 전공투는 당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제자들을 경찰에 넘기는 교수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과거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면서 제자들을 전쟁터로 보낸 것과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며 분개했다. 하지만 전후 일본의 가짜 평화에 반기를 든
이들의 ‘반란’은 사회에서 철저히 묵살되었다. ‘묵살된 반란’은 1970년대 중반에 극좌 조직으로 이어지고 결국 좌파 세력은
고립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 좌파의 자기 분열적 행로는 패전 후 일본 사회가 빠져든 이념적 분열의 축소판이다.
좌
파 학생운동으로 기억되는 1960년대의 일본 학생들의 ‘일탈’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행동의 과격함이나
사상의 급진성 때문만은 아니다. …… 사건은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를 학교로 초청해 강연을 듣고 전공투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 일이다. ……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미시마의 우파적 공격에 전후 민주주의에 좌파적 공격을 가하던
학생들이 동조한 것이다. 세 번째 사건은 전후 평화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마루야마 마사오 교수를 연구실에 감금한 일이다. ……
당시 도쿄대학 전공투의 주요 멤버였던 작가 고사카 슈헤이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우리들의 머리가 ‘정상’이었는지 자신이
없다.”라고 하면서…… 전공투 학생들은 일본 사회가 ‘공기’처럼 누리고 있는 평화와 민주주의가 사실은 미국의 침략 행위와 그 행위를 지지하는 일본의 전후 공간 그 자체이며, 따라서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공투 학생들의 행동이 언론에서 지지를 받지 못한 까닭은 행동의 ‘과격함’ 때문이 아니라 전후 공간의 ‘허상’을 꿰뚫어본 점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전후 평화주의에 대한 반란․27~36쪽
2장 트라우마
미
국의 원폭 투하로 전쟁이 종결된 이후 일본 사회가 겪게 된 집단 심리적 외상, 즉 트라우마의 증상을 살펴본다. 원폭은 일본에게
엄청난 피해를 줌과 동시에 전쟁 조기 종결을 가져온 선물이고 일본에 지배받던 나라들에게는 해방을 안겨다준 ‘정의의 무기’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일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그렇다면 원폭은 누구의 잘못인가? 원폭을 투하한 미국인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에 담긴 미국 대 일본, 일본 대 아시아 구도를 없애고
핵무기 대 인간이라는 보편적 평화주의를 외친다.
1996
년 8월, 히로시마를 방문한 당시 자민당 국회의원 가메이 시즈카 중의원 의원은 이 (원폭) 위령비를 보고, “이곳 평화공원에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라니! 일본군이 원폭을 투하하지도 않았는데”라고 말했다. 2005년
7월에는 27살 난 우익 청년이 위령비에 새겨져 있는 “잘못”이라는 부분을 망치로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치적 우파에 속한
사람들의 ‘비판’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원폭 사용국인 미국에 대해 명확한 비판을 하지 않는 일본 정부나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의 성격도 동시에 지닌다. 진주만 습격 등 일본의 침략 전쟁과 원폭 사용을 인과관계로 파악할 경우, 원폭 비판이 침략 전쟁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었다. ― 원폭은 누구의 잘못인가?․149~150쪽
1999
년 일본에서 국기․국가법이 제정된 뒤로 침략 전쟁과 천황 절대주의의 상징물인 기미가요(국가)와 히노마루(국기)를 둘러싼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사이타마 현의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새로 부임해 온 교장이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강제하자 졸업식을 별도로
개최하였다. 전국 체전이 열렸을 때 전쟁에서 히노마루가 했던 역할을 생각하고 반성해야 한다며 히노마루를 불태운 사람도 있다.
같
은 해 3월에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교장이 히노마루를 게양하자, 2학년 여학생이 연단에 올라 히노마루를 찢어 하수구에 버리는
사건도 있었다. 그 여학생은 “히노마루는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에서 어쩔 수 없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이런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오키나와의 역사 때문이다. …… 치비치리가마 사건이란 1945년 4월 2일에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자, 치비치리가마라 불리는 동굴에 피신해 있던 지역 주민 139명 중, 84명이 집단 자살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주고 총칼로 위협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하였다. ‘집단 학살’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42년 후인
1987년에 지역 주민들은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평화의 상’을 건립하였지만, 그 직후에 우익 단체들은 이 상을
파괴하였다. 파괴 현장에는 “국기를 태우는 마을에 평화라니 말이 안 된다. 천벌을 내린다.”는 범행 성명서가 남아 있었다. ― 히노마루와 기미가요․164~166쪽
한
국에서 병역 거부는 곧 감옥행을 뜻한다. 그래서 때로 부모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한 아들에게 다시 복귀하라고 눈물 어린 호소를
하기도 한다. 지금 일본인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자식에게 총을 잡으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목숨을 다해
싸우는 ‘옥쇄와 가미카제의 군대’를 보유했던 일본에도 병역 거부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 침략 전쟁을 거부하며
병역을 기피했던 사람들이 겪은 고난과 피해는 전후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1945
년 11월에 일본 군대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도쿄재판에서 적어도 1931년 이후에 일본이 벌인 전쟁은 범죄로 국제적인 판결을
받았다. 이에 따라 약 1천 명의 전범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한다면, 침략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한 병역
거부자나 기피자가 전후에 영웅 대접까지는 아니더라도 ‘왕따’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전쟁은 잘못된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으니, 잘못된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했거나 피한 사람들의 선택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용기 있는
선택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실제로 1945년 이전에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나 집단이 전후에
명예 회복, 손해 배상, 진상 규명을 국가에 요구한 사례는 거의 없다. 유일하게 1968년에 치안유지법 피해자들이 ‘치안유지법
희생자 국가 배상 요구 동맹’을 결성해 치안유지법에 의한 체포, 구금, 취조 등에 따른 정신적·육체적·물질적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과는 없다. …… 이것이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의 한계와 성격이다. ― ‘가미카제’ 나라의 병역 기피․188, 191쪽
3장 자기 기만
3
장에서는 ‘작은 나라 콤플렉스’에 빠진 큰 나라, 평화헌법과 ‘자위대’가 공존하는 이상한 군사 대국, 일본의 자기 기만을 읽는다.
자국 영토가 한국 영토의 2배, 영국보다 1.5배나 더 큰데도 스스로 ‘작은 나라’임을 자처하는 일본은 언론을 통해 ‘씩씩한’
한국 젊은 군인들을 소개하면서 군사적, 외교적, 정치적으로는 ‘작고 허약한’ 상태라는 점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이러한 ‘작은
나라 이데올로기’에는 강자가 되고 싶어하는 일본의 팽창 지향성이 담겨 있다.
일
본이 스스로 자조적으로 ‘작다’고 표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물론 스스로를 ‘작다’고 표현하는 것은 서양과 비교해서이다. ……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작다’는 ‘큰 것’을 지향하는 것일 뿐, 스스로를 절망적으로 규정하는 표현은 아니다. 일본이 스스로
‘작다’고 표현하는 것은 강자에 대한 지향의 조건 규정이고, 구성원에게 끊임없이 ‘긴장’을 환기시키는 장치로 작용해 왔다. 서양에
대해 느끼는 위기와 서양을 향한 지향을 동시에 품고 있던 19세기 일본에게 ‘작은 나라 이데올로기’는 이런 이유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작은 나라 이데올로기’는 19세기 서양에 대한 일본의 자학적 표현이면서 동시에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지향점을
각인시켜주는 팽창적 자기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 ― ‘작은 나라’ 콤플렉스․222~223쪽
국호 논쟁에서는 ‘강함’에 집착하는 일본의 지향성이 드러난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국호를 읽을 때도 최대한 강한 국가로 인식될 수 있도록 더욱 힘차게 발음하고 싶어 한다.
1930
년대라는 시기가 천황제 파시즘으로 돌입하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호칭의 변화가 지니는 사회적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닛폰’에 대해서 1935년에 오쿠마 도쿠이치는 《대일본 국호 연구》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영원히 쉼 없이 발전하는 위대한 힘으로 가득 찬 황국(皇國)의 국호를 힘차게 ‘닛폰’으로 읽는 것이 지당하다.
닛(ニッ)이라는 촉음은 내부에 힘을 가득 채운 다음 밖으로 내어 발전을 촉진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폰(ポン)’은
충실한 힘을 강렬하게 뻗어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돌파하고 매진하려는 가장 위대한 힘을 보여준다. 실로 ‘닛폰’이라는 이름이야말로
태양과 함께 영원무궁, 아니 번영에 번영을 거듭해 가는 ‘태양의 나라’ 황국의 국시에 가장 적합한 호칭이다.” …… 최근의
‘닛폰’ 선호 현상을 곧바로 1930년대 일본의 파시즘화와 연결해 생각하는 것은 다소 몰역사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니혼’에서
‘닛폰’으로의 변화가 단순히 편의적인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 ‘니혼’인가 ‘닛폰’인가?․214~216쪽
4장 불안
지
금 일본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사회심리적 코드는 ‘불안’이다. 저자는 일본의 ‘불안’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이 가져온 급격한
양극화로 인한 사회 불안과 외교․안보 영역의 불안이 겹치면서 ‘북한’이라는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로 나타난다는 데
특징이 있다고 분석한다. 외국인 지문 날인 제도의 부활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직
업상 일 년에 몇 번씩 일본을 드나들면서 최근 피부로 느끼는 변화가 있다. 그중 하나가 일본 입국 때 지문 제공과 사진 촬영을
요구받는 것이다. 2007년 11월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특별 영주권자를 제외하고 일본을 방문하는 모든 16세 이상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다. 2006년 5월 24일에 공포된 ‘출입국 관리와 난민 인정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에 따라 시행되는 제도이다.
…… 1999년 외국인 등록법이 개정되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지문 날인 제도가 폐지된 지 약 10년 만에 형태를 바꿔
‘부활’한 셈이다. …… 이 조치들은 모두 ‘테러리스트’의 일본 입국을 막는 데 목적이 있다. 9·11 이후 미국에서 실시된
제도의 ‘일본판’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각종 테러 사건 중에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이 일으킨 사건은 한 건도
없다. 1995년에 옴 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사건’도 외국인과는 무관하다. 그런데도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면 ‘잠재적인 테러리스트’인 셈이다. ― 번지는 ‘불안’ 증후군․309, 312쪽
안
보 불안은 심지어 일본의 인권 문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의 시민 사회는 지난 2002년부터 힘을 합쳐 한국과 같은
독립적인 인권위원회 설립을 시도해 왔지만 자민당 강경파의 맹렬한 반대로 인권옹호법안의 국회 제출이 무산되었다. 인권옹호위원 자격
조건에 ‘국적’ 조항이 없으므로 재일조선인이 선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일본 국민의 인권 침해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것이다.
결
국 인권위원회와 인권옹호위원 자격 조건에 ‘국적’ 조항이 없으니, 다수의 재일조선인이 인권옹호위원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북한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인권적 쟁점이 발생했을 때 일본에 불리한 결과를 빚어 결국에는 일본 사회를 엄청난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이 반대론의 골자이다. 물론 인권옹호위원 조항에는 ‘국적’ 조항이 없다. 따라서 재일조선인도 인권옹호위원이 될 수
있다. ……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이, 그것도 북한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조선총련의 구성원이 일본 인권옹호위원으로
위촉될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회의 등이 인권옹호위원의 ‘국적’ 조항을 들어 인권옹호법안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적
구분법이 일본 사회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적 구분에 의해 ‘적’과 ‘나’를
구별하고 양자를 대립시키는 구도를 만들어 일본 사회 내부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봉쇄하는 것이다. ― 일본에는 인권위원회가 없다․336~337쪽
일
본 사회의 불안 지수를 상승시키는 주요 원인의 하나인 ‘격차’는 바로 양극화를 뜻한다. 특히 청년층의 실업과 비정규직 취업으로
인한 세대 격차가 핵심이다. 현실에 좌절한 젊은이들은 ‘히키코모리’가 되어 스스로 사회와 단절을 선택하거나, 분노와 무력감을
무차별 살인으로 폭발시키고, 잠시만이라도 일본을 떠나려고 노력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청년들의 좌절과 방황을
바라보는 어른 세대의 눈은 차갑기만 하다.
2004
년 10월 30일 새벽, 바그다드에서 머리가 잘린 일본인 청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고다 쇼세이(香田證生),
24세였다. 인질범들이 보내온 그의 영상이 일본 텔레비전에 보도된 것은 26일. 화면 속에서 고다는“자위대를 철수하지 않으면 제
목을 자르겠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일본에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겁에 질린 채 말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즉각 ‘자위대
이라크 철수 불가 방침’을 천명하였고, 그로부터 불과 사흘 후에 고다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 고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냉정했다. …… (전쟁 중인 이라크에 별다른 계획 없이 들어갔던) 고다의 불가사의한 행동을 두고 ‘무모’, ‘경솔’이라고
비난하면서도 그가 왜 이런 무모하고도 경솔한 행동을 했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없었다. 철부지 20대의 한심한 행동이라는
평가로 충분했던 것이다. ― 이라크에서 살해된 일본인 청년․367~368쪽
지은이 소개
권혁태
1959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일본 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성공회대학 일어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릿쿄대학 초빙 연구원, 규슈대학 대학원 초빙 교수를 지냈고, 현재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이다.
만화, 영화 등을 통해 일본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일본 진보 운동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재일조선인과 한국 사회>, <교과서 문제를 통해 본 일본 사회의 내면 읽기>, <일본의 헌법 개정과 한일 관계의 비대칭성> 등의 논문을 썼으며 《아시아의 시민사회》, 《반일과 동아시아》, 《한․중․일 3국의 8․15 기억》 을 함께 저술했고 《히로히토와 맥아더》를 우리말로 옮겼다. (email :kwonht@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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