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일본에서 ‘교사가 학생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를 뜻하는 ‘학급 붕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일본의 ‘학급 붕괴’는 한국으로 건너와 ‘교실 붕괴’ ‘학교 붕괴’로 바뀌어 ‘공교육의 위기’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우리의 학교와 교실은 여전히,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체벌 금지 1년을 맞아, 체벌 금지 조치 때문에 학생이 교사의 지도를 거부하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등 교권 침해가 심각해졌다는 비판이 거세다. 그러나 체벌 금지와 학교 붕괴는 관계가 없으며 체벌은 위장된 폭력일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금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교육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책은 많았다. 그러나 《학교의 풍경》만큼 바로 이 순간 대한민국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고 솔직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 대학 입시라는 대전제가 지배하는 교실에서 무기력과 순응과 저항을 오가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끊임없이 학교에 질문을 던지는 11년차 교사의 좌충우돌 분투기!
《학교의 풍경》은 인간다움이 숨 쉬는 학교를 꿈꾸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투해 온 교사 조영선이 11년간 보고 겪고 느낀 학교 이야기다. 저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또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대한민국 학교의 현실을 무섭도록 생생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유쾌하고 발랄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끝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성적이나 품행으로 간단히 등급이 분류되고 마는 아이들이 실은 각자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새삼스럽고도 아프게 느끼게 된다. 당연하다고 여겨 온 학교에 얽힌 무수한 통념을 뒤흔드는 문장들을 만나며 ‘학교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교실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담임 선생이 실은 거대한 학교 체제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이들 앞에 솔직히 밝히는 교사, 자신과 아이들의 만남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벽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는 교사, 아이들을 가르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소통하고 성장하는 동등한 대상으로 여기는 교사……. 이 책은 교사 조영선의 현재진행형 성장기이자, 지금 우리 아이들의 학교와 교실의 진실을 드러내는 생생하기 이를 데 없는 비판적 교육 에세이다.
“나는 아이들이 고개를 바짝 쳐들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나는 교육이든 운동이든, 자기가 비참한 대우를 받을 때 분노를 느끼고 그것을 거부하며,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에는 비굴함에 대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이지 않은 대우에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든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고개를 바짝 들 수 있는 인간이 되게 하고 싶은 것이다. …… 나는 학생들이 고개를 바짝 쳐들 때마다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 <들어가는 글>에서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겁 없는 교사 조영선의 좌충우돌 교단 분투기
학교는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다. 더는 신분 상승을 꿈꾸기 힘든, 부모의 빈부 격차가 고스란히 교육 격차로 드러나는 공간,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둘러싸고 격렬한 이념 논쟁이 벌어지는 공간, 국가와 교육 행정가들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인 통제와 억압을 가하는 공간, 학교에서 가르치는 온갖 아름다운 가치들, 즉 자유와 평등, 인권, 정의, 배려가 현실과 거리가 먼 허상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먼저 몸으로 깨닫는 곳이 바로 학교다. 그리고 이 모든 모순과 긴장의 한복판에 교사들이 서 있다. 《학교의 풍경》의 저자 조영선은 이 전쟁터 같은 학교에서 자신이 왜 교사가 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보기 드문 교사다. 이 책은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평범한 꿈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배반당하는지에 대한 아픈 기록이자, 학교 현장의 온갖 모순에 관한 명쾌하고 전복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비판적 에세이다.
아이들을 무서워할수록 아이들은 무서워진다
《학교의 풍경》은 크게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참교사’의 꿈을 안고 교단에 섰지만 아이들을 힘으로 윽박지르지 않고는 수업을 하기 힘든 현실에 좌절했던 신규 교사 시절부터, 진리의 주체로서 ‘올바른 것’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한계에 솔직해지기로 마음먹기까지 교사 조영선의 파란만장한 성장기가 담겨 있다.
아이의 곱슬머리가 유전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라는 요구에 부모와 학생, 담임교사가 번갈아 학생부 호출을 받은 황당한 이야기, 보기에 아름답고 평화롭고 모두 만족스런 학급이란 있을 수 없음을 가르쳐준 학급 자치 실험 실패기, 교사에게 수업보다 공문 처리가 우선이라고 가르쳐준 교무실 권력의 풍경, 장학사가 되면 아이들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며 신규 교사에게 대학원 진학을 추천하는 선배 교사 등 저자가 10년간 학교에서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부모가 인정하는 곱슬머리를 학교가 문제 삼아 수업 시간을 빼서 미용실에 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학생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선생이면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아이를 위해 항의하지 못했다. 항의하러 갔다가 결국 “우리 반 아이는 그런 애 아니라고, 제가 잘 돌보겠다고” 죄인처럼 말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3년을 이 공간에서 버텨야 할 아이가 튀지 않게, 선생님들 사이에서 낙인찍히지 않게 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마음 한쪽에서는 5년을 버텨야 할 내가 새 학교에 온 지 4일 만에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을 해결한 것은 나의 비굴하고 이중적인 태도가 아니라 어머니의 솔직하고 담백한 태도였다. …… 수업 시간 끝나기 5분 전에는 수시로 생활교육부의 방송이 나왔다. “머리 기르려고 6시에 등교하는 학생, 내일부터는 일과 시간에 교실 돕니다. 걸리면 미용실에서 석호필처럼 만들겠습니다. 노스페이스 옷 입은 학생, 노스페이스 학교에 가십시오.” 고1만 해도 아이들은 내년에 민증을 받는다고, 어른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학교는 점점 유치해져만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이들을 무서워할수록 아이들은 무서워진다․40~41쪽에서
교사의 입지가 줄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인 지도가 아이들의 저항으로 먹히지 않는 것일 뿐, 학급 안에서 담임 교사의 권력은 중세 시대 군주와 거의 동일하다. 학급 규칙을 자의적으로 만들고 폐기하고 실행하고 징벌한다. 물론 학급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더 많은 정보와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담임이 개입해 학급회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담임이 외부적으로는 또 권한이 거의 없다. 교칙을 거부할 수도 없고, 학교 교육 과정에 개입할 수도 없다.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스스로 나에게 준 대답은 “아이들 앞에서 솔직하자.”라는 것이다. 이제는 ‘담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아이들 앞에서 솔직히 밝혀야 한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말이지만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보기에 전지전능한 부모와 황제 같은 담임이 거대한 학교 체제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것을 교사 스스로 아이들에게 밝히는 일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호랑이 굴에서 인권을 고민하다․66~67쪽에서
“학교 오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학교 정글에서 좀비가 된 아이들을 만나다
<2부 “선생님, 나 여기 살아 있어요”>와 <3부 우리를 슬프게 하는 학교의 풍경들>에는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절망과 체념부터 가르치는 성적 중심의 서열 매기기, 자기 정체성을 철저히 부정당하는 학교에서 좀비나 괴물로 변하는 아이들, ‘인(in) 서울’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 10퍼센트의 ‘학습권’을 전체 학생의 인권보다 우선시하는 대한민국의 보통 중 ․ 고등학교의 일상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에게 이 아이는 거의 그 반의 ‘가구’ 같은 존재였다. 처음엔 그 아이를 깨워봤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쓰러졌다. 화장실을 다녀오라 해도 다녀와서 다시 쓰러졌다. 아이들도 원래 모든 시간에 자는 아이니 신경을 끄시라고 말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려도 일어날 줄 모르고, 아이들 말에 따르면 점심시간에는 일어나 식당에 가는데, 갔다 오면 다시 잠이 든다고 했다. 나는 사실 그 아이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학교에 와서 잠만 자면 어떻게 하냐고. 너희 부모님은 네가 이렇게 학교에 와서 자는 걸 알고 계시냐고. 그런데 그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매일 자기의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 아이가 잠을 자는 것은 그냥 졸려서가 아니라 어떤 집요한 ‘선택’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입시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그래서 입시에 관심이 없는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수업에 대한 일종의 준법 투쟁.― “학교 오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149쪽에서
아이들이 꿈이 없는 것은 정말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제고사를 치르면서 자기가 꿈을 꿀 자격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학교 좀비 생활을 시작한다.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그들대로 ‘경쟁의 신’에게 영혼을 판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입시 능력을 올려주는 곳은 학원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내신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만 수업을 들으며, 수행평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하지 않고, 선생님이 뭔가 수업 내용이 아닌 얘기를 할 때는 영어 단어장을 꺼내 든다. 학원에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잠을 청하기도 한다. 공부를 안 하는 아이들은 ‘태업의 신’에게 영혼을 판다. 학교 일과가 끝나고 피씨방이나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 아르바이트 시간에 살아 있기 위해 학교에서는 정말 단 한 시간도 깨지 않고 자기도 한다. 즉 학교에서 아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좀비’의 삶이다. ― “나도 해임하라”․231~232쪽에서
체벌 금지 시대를 사는 법- 학생의 인권과 교권은 서로 충돌하는가?
<4부 인간다움이 살아 있는 학교를 위하여>는 최근 우리 교육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학생인권조례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저자는 전교조 내에서도 찬반이 갈리는 체벌 금지와 두발 자유, 학생들에게 사상과 집회의 자유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는 이유를 밝힌다. 저자는 학생 인권과 교권이 결코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며, 학생 인권이 인정받을 때 비로소 교사의 인권과 권위도 바로 설 수 있음을, ‘인권’의 언어로 아이들과 새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말한다.
체벌 금지에 반대하면서 ‘지금까지 묵묵히 아이들을 위해 교단을 지켜 온 교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이야기한다. 교사들은 지금까지 아이들을 위해 교단을 지켜 왔는가? 우리의 성실함은 지금까지 아이들을 구실로 묵묵히 내 한 몸 바쳐 학교와 교육의 억압 체계를 지켜 왔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교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정말 ‘학생 인권’인가? …… 수업 10분 단축 여부도 교장의 기분에 달린 교장 1인 독재의 학교 시스템, 힘 있는 학부모들의 교권 침해, 수업에 들어와 다과를 들며 수업을 감상하는 이상한 교원 평가, 국영수 외에는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교육 과정, 학교 밖에서 이미 곪아 터진 문제로 아파하는 학생을 지원하는 시스템의 부재 등 아이들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벽들에는 묵묵히 있으면서 왜 유독 학생 인권에 볼멘소리를 내고 있는가? 어찌 보면 지금이 ‘교육 기관의 수족’에서 ‘가르치는 존재’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다. ― 학생 인권이 바꾸는 학교의 풍경들․311쪽에서
《학교의 풍경》은 유쾌하고 발랄하게 웃기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쓴 글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을 보여준다. 한 교사의 개인적인 체험과 주장이 담긴 이야기가 보편적인 공감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과 반성, 어떤 실패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다시 한 발을 떼어놓는 용기 덕분이다.
이제 나는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88만원 세대가 될 수밖에 없는데 꿈이 없다고 아이들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부모가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학원비를 벌어야 해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는데 그런 아이들에게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싸가지 없는 아이들이라고 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 아이들을 잘 지켜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간섭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손 내밀 수 있는 곳에 내가 있음을. 너희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해결은 못해주더라도 같이 쩔쩔매줄 수 있음을.너희가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대신 싸우지는 못해도 너희가 싸우는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음을.― 호랑이 굴에서 인권을 고민하다․ 55~57쪽에서
교사로서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8할이 절망이라고 고백하는 저자는 억지 희망을 강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교사로서 느끼는 절망과 불안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인정함으로써 교사 조영선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는, 아이들을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잠재적 괴물로 보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선생님, 우리 모두 똑같이 사랑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마음이 보들보들한 아이들과 교육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억압에 맞서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꿈틀하는 것이 살아 있음의 증거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아이들과 ‘인권’을 바탕으로 새롭게 동등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
날카로운 인권 감수성으로 포착한 학교 현장의 모순과 허위!
《학교의 풍경》에는 저자 조영선이 특유의 섬세한 인권 감수성으로 포착한 날것 그대로의 학교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자라나는 풋풋함이 넘치는 학교는 우리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진짜 학교의 풍경 속에는 아침 일찍부터 교문 앞에서 “큰 얼굴 가리려는 긴 머리”를 잡는 간수 같은 교사가 있고, 뭐든 해보려는 교사를 억누르는 권력의 그물망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학교와 교육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는 도발적이고 근본적인 질문과 날카로운 통찰을 마주하게 된다.
누가 아이들을 ‘무서운 10대’로 만드는가?
저자는 두발과 용의 복장 단속 같은 학교의 근대적 억압 기제가 기본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만약에’라는 단서를 달고 언제나 빈틈 없이 통제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이라고 믿는 학교의 그런 불신과 지나친 규제가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닐까.
“너희 3월이라 조용한 거지? 곧 사고 칠 거지? 그래서 너네 사고 안 치게 하려고 선생님들이 두발이랑 복장 검사하는 거야. 그래야 대학 잘 간다.” 초장에 질서를 잡아야 한다며 아침마다 교문에서, 조회 시간에 교실에서, 수업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다. 그 등쌀에 못 이겨 애들이 사고를 치면 “거봐, 내가 뭐랬어. 사고 칠 거라고 했지? 3월에 잡았으니까 이 정도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아이들을 마치 괴물 새끼 대하듯 하고, 진짜로 괴물이 되면 그것 봐라 할 정도로 그렇게 학교는 아이들이 무서운 걸까?― 아이들을 무서워할수록 아이들은 무서워진다․42쪽에서
저자는 체벌 금지 이후 교사를 대상으로 한 아이들의 ‘짐승 같은’ 폭력적 행동은 바로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 우리 사회가 길러낸 모습이라고 지적한다. 교사들이 체벌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서로 합의되지 않은 의견은 결국 권력자의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도 말로 되지 않으면 힘으로 해결하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억압적인 교육 체제는 체벌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우아함을 잃지 않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할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때려서 학교 폭력 추방 캠페인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더는 이런 사기 행각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우아한 세계는 없으니 그냥 폭력으로 살자고 가르치거나, 우리도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할 테니 너희도 싸우지 말라고 얘기해야 한다. ― 체벌은 폭력이다․202쪽에서
두발 지도의 가장 큰 문제는 타인의 신체적 자유를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체벌의 근본 문제 역시 잘못이 있다면 폭력으로라도 그것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경쟁적인 입시 지도의 근본 문제도 ‘나를 위해 남을 짓밟을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질서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을 존중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힘센 교사들이 학생들의 잘못을 체벌로 다스리듯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약한 선생님의 잘못을 폭행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입시에 해당되지 않는 수업 정도는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기 때문에 딴짓과 태업을 일삼는 것이다. ― 자유와 평등을 가르치는 것이 두려운가?․287쪽에서
학교 권력의 피라미드와 폭력의 연쇄
지금도 여전히 학교를 아름다운 가르침과 배움이 존재하는 순수한 공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저자의 눈에 비친 학교는 정글과 다를 바 없이 힘의 투쟁이 일상화된 약육강식의 공간이자,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비교육적인 폭력이 묵인되는 모순의 공간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약육강식의 원리를 몸으로 먼저 터득한다. 학교 내 권력 구도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교장, 교감 〉남교사(체육 교사, 생활지도부 교사) 〉일진, 우등생 〉나이 든 여교사 〉젊은 여교사 〉보통 아이들 〉왕따 아이들]교사가 체벌을 가할 때도, 학생들 간에 폭력이 일어날 때도, 학생이 교사에게 폭행을 가할 때에도 이 힘의 질서는 분명한 영향을 끼친다. 교사는 순진하고 만만한 보통 아이들이나 왕따 아이들을 때리고,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만만한 ‘젊은 여교사’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학생들의 폭력과 체벌은 샴쌍둥이와 같다.
흔히 학교의 약자인 ‘젊은 여교사’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체벌할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주장은 약자에게 더 약한 자를 학대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학교에서 ‘절대 약자인 아이들’이다. 오히려 이른바 ‘일진’ 애들은 교사도 건드리지 않는다. 괜히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순진하고 만만한 아이들이 ‘본때’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교사에게는 덫이 된다. …… 이 권력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폭력을 쓴다. 자살한 학생이 일진이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마 다른 만만한 아이에게 학교 폭력으로 분풀이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 사건이 더 비극적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학교 폭력과 체벌은 샴쌍둥이와 같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체벌은 폭력이다․195, 196쪽에서
“인권이라고? 니들이 인간다워야 인간 대접을 해주지!”
‘학생인권조례’는 개인의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두발 자유, 체벌 금지, 학생들의 기본적인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강제 야간 자율 학습 ․ 보충 수업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학생 인권을 불편해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보면,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인 학생에게 어른과 똑같은 권리를 준다는 것에 대한 왠지 모를 거부감, 한편으로는 가정에서 자신의 자녀를 못 미더워하는 점 같은 것이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학생인권조례 서명에 주춤거리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학생 인권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불편한 속내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안에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소년을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여 ‘나이가 어린 인간’으로 볼 때, 이전에는 ‘나이가 어린’에 주목했다면 ‘학생 인권’은 ‘인간’에 주목해 달라고 주문한다. 이에 대한 기성 세대의 대답은 이러하다. “인간답게 굴어야 인간다운 대접을 해주지.” “너네가 어리니까 면제받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럼 그런 것도 다 포기해. 그래야 공정한 거 아니야?” 이러한 대답에 숨어 있는 마음은 이런 것들이다. “인간다운 대접은 모든 인간이 다 받는 게 아니야. 자격이 있는 사람만 받는 거야.” 이거 들어본 얘기 같지 않은가? 여성 차별을 이야기할 때,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이야기할 때,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같은 노동 조건을 요구할 때, 똑같이 대답한다. “여자들도 군대 갔다 와. 자격을 갖추라는 거지. 우리나라 국민이 아닌데 무슨 똑같은 월급이야, 세금을 내서 자격을 갖춰야지. 비정규직 주제에 어떻게 정규직을 넘봐, 정규직 시험을 봐서 자격을 갖춰야지.” 즉 성별, 학력, 국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사람 대열에 끼워주지 않는 논리가 청소년을 대하는 교육의 현실에도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 인권이 학교에 질문하는 것들․315~316쪽에서
더욱 씁쓸한 사실은 이처럼 인권을 무시하는 교육은 결국 세상 앞에 당당한 인간이 아니라 체제 순응형 인간을 양성해내는 데 이바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교육일까?
사실 인권은 어찌 보면 간단한 것이다. 이 세상 사람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것이다. 보수 언론이 대변하는 사회 기득권층은 미래에 노동자가 될 학생들이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을 두려워한다. 노동자들은 회사가 요구할 때마다 인간다운 노동 조건을 포기하고 잔업에 동원되어야 하며,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라면 관리자들이 가하는 모욕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엘리트 한두 명이 수백만의 노동자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자신의 머리 모양과 복장이 ‘누구’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사회가 누구에게나 살 만한 사회인지, 생산성 향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강제 보충 학습과 야간 자율 학습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야근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또 학교에서 누군가 힘 있는 존재는 나를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힘 있는 관리자의 부당한 해고도 ‘그럴 수 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 학생들의 근로기준법, 학생인권조례․272~273쪽에서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 모두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다운 대접을 하지 않으면서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이 가능한가?” 자신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그것을 보장하도록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주체로서 인간을 키워내기 위해 교육에 바라는 것은 뭘까? 그것은 “다른 모든 교육을 차치하고 어떤 성별, 인종, 사회적 배경, 성적 정체성, 외모, 지역 등 어떤 요소에 의해서도 차별받지 않고 학교에서만큼은 인간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정글 같은 사회에 나가서도 그렇게 서로에게 인간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했던 기억과 습관을 되살리며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을 지닐 수 있다.” 현재의 학교는 이러한 기대를 갖기엔 너무 멀리 가버린 걸까? 아니, 우리 사회에 이런 기대와 믿음을 품는 것이 너무 욕심을 부리는 일일까? 《학교의 풍경》 속에서 아이들이 제기하는 수많은 질문들에 어른들은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해야 한다는 열망 때문에 학교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 따로, ‘인간’ 따로, ‘교육’ 따로, ‘삶’ 따로. 아이들과 교육에 과도하게 특수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이 ‘인간다움’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배움과 가르침이 있는 것인데, 우리는 교육의 결과를 통해 인간의 자격을 나누고 그 자격 조건 안에 들게 하기 위해 인간다운 대접을 포기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인간다운 대접, 인간다운 삶이 학교와 사회에서 복원된다면 내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인간다움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머리말․10~11쪽에서
추천사
이 책에는 학교 현실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비판이 넘치도록 실려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을 넘어 교육을 둘러싼 모든 쟁점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용기와 근본적인 성찰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예를 들어 교권과 인권의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면서도 정면으로 대결하기를 꺼려하는 민감한 쟁점이다. 조영선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감연히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비판적이되 냉소에 빠지지 않고, 열정적이되 현실의 지평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제 《학교의 풍경》을 읽지 않고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바라보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한국 교육 문제를 대증요법이 아니라 원인 치료로 접근하려면 이 책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조영선이라는 젊은 교사가 있다. 전형적인 서울 중산층의 자녀로 더할 수 없는 모범생으로 자라났으나, 학교가 좋았고 아이들의 생기를 사랑해서 교사가 되었다. 곤경에 처한 아이들에게 ‘해결은 못해줘도 같이 쩔쩔 매주는’ 교사가 되고자 했고, 1년 내내 맡은 아이들을 데리고 세상의 온갖 것들을 보여주고자 했고, 고통과 슬픔을 스스로 드러내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그렇게 좌충우돌 부딪치면서 그 자신 ‘분노’와 ‘투쟁’을 배웠다. 교단에 선 지 십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는 자신의 신념을 타박하는 교장 선생의 말에 혼자 눈물을 쏟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원래 가던 길을 간다. 그에게는 그 사이 체득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조영선, 그가 십여 년간 지켜본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이를 외면하지 못해 벌인 좌충우돌의 시간들이 그려낸 ‘학교의 풍경’, 이것이 진짜다. 자유를 갈구하는 아이들의 종달새 같은 울음소리가 어디든 배어 있는 바로 이 ‘학교의 풍경’이……. - 이계삼 (밀성고등학교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조영선은 이 책에서 어거지 희망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은 이 절망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며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을 더듬거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교사가 학생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힘들어 한다. 교사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어른은 죽었다. 그런데 조영선은 아이들이 ‘교사는 무시해도, 친구는 무시 못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너희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니?”라고 억울해하는 것이 아니라 “넌 내가 니 친구라도 이럴 꺼니?”라고 질문을 바꿨다. 그래서 조영선은 학생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것에서 분노를 느끼기보다는 희열을 맛본다. 학생들이 싸가지가 없다고 섭섭해하지 않는다. 꿈틀한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자신의 존엄을 때로는 소심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영선은 이런 새로운 관계 맺음의 언어를 인권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에게 인권은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충돌하는 제로섬 게임의 공간이 아니다. 인권은 관계의 문법이다. -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지은이
조영선
20대 이전까지 메인스트림(?)으로 살다가 20대 이후 세상의 쓴맛을 알게 된 후 겸손해졌다. 머리보다 마음과 발의 속도가 빨라 저지른 후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통을 희화화하여 삶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2001년 교사가 되어서 목일중학교, 경서중학교를 거쳐 경인고등학교에서 4년째 가르치고 있다. 교사로 ‘행복한 밥벌이’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학생 인권을 만난 후 ‘내 안의 꼰대스러움’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학교를 견디는 힘’이 커지고 있다고 느낀다.
인권을 만난 이후 세상과 좌충우돌하는 ‘우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인권을 만나 느낀 내 안의 ‘자유’와 ‘당당함’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나누는 데 관심이 많다.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인권 교육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실제 인권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들’에서 만난 친구들과 《인권, 교문을 넘다》라는 책을 썼다. 학교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는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