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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인문학

[다석 중용 강의] 책 소개

by 교양인 2012.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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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중용 강의(보도자료).hwp

 

 

 

예수와 석가와 공자가 만나 ‘중용’을 이야기하다

 

 

 

 

 


★ 2011년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유교가 오늘에도 우리에게 소용이 있다면

그것은 유교가 고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난을 떠나 안일(安逸)을 찾으면 유교의 정신은 죽고 만다.

사람은 안일에 죽고 부귀에 썩는다."(다석 류영모)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은 하나다!

다석 강의로 다시 읽는 중용 사상

 

기독교를 큰 줄기로 삼아 유교, 불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대사상가 다석(多夕) 류영모. 그는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석가․공자․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다석은 여러 동양 고전을 우리말로 옮겨 강의 자료로 썼으나 우리말로 완역한 것은 《중용(中庸)》과 《노자(老子)》뿐이었다. 《다석 중용 강의》는 다석의 직제자 박영호가 다석의 《중용》 번역과 강의를 바탕으로 삼아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이한 책이다.

다석 류영모가 YMCA 연경반 등에서 행한 고전 강의에는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석의 강의는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모아 세움으로써 사상의 일대 장관을 만들어냈다. 독창적인 언어로 대자유의 세계를 구현한 다석의 사상은 한국 지식계에 저류와도 같은 영향을 끼쳤다. 다석은 유교 경전 중에서도 특히 《중용》을 형이상학적 진리를 담은 경전으로 소중히 여겨 직접 번역하고 강의하였다. 《다석 중용 강의》는 1967~1968년에 다석 류영모가 우리말로 완역한 《중용》과 강의 내용을 40여 년 만에 그의 참제자 박영호가 쉽게 풀이한 책이다.

《다석 중용 강의》에는 공자의 유교 사상뿐만 아니라 불교, 기독교, 노장 사상을 포함한 종교 사상 전반에 대한 다석의 고유한 해석이 깊고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예수와 석가와 공자가 한자리에 모여 앉은 듯, 《중용》을 주제로 삼아 동서가 회통하는 말씀의 향연이 펼쳐진다. 다석의 해석을 통해 공자는 하느님의 아들로 나타나며, 《중용》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드러난다. 동서 사상을 두루 꿰뚫어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종합한 대각(大覺)의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막힘없는 깨달음의 경지가 독특하고 생생한 언어로 솟아난다.

 

 

다석 연구에 빛이 될 또 하나의 귀한 텍스트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달통했던 사상가 다석 류영모는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현재 다석의 사상이 담긴 책들은 다석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다석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적은 기록이거나 해설서이다. YMCA 연경반 강의의 속기록 전문을 다듬은 《다석강의》와 금욕 수도 공동체 ‘동광원’에서 한 강의를 녹취해서 푼 《다석 마지막 강의》가 다석의 육성을 생생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다석 중용 강의》를 통해 다석 류영모의 독창적 유교 해석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은 다석이 우리말로 완역한 《중용》과 그것을 토대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또 하나의 귀한 다석 사상서이다. 여기에 다석이 인정한 유일한 직제자 박영호가 쓴 풍부하고 깊이 있는 해설은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었던 다석 사상의 넓고 깊은 지평을 한층 가깝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젊은 류영모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구학문을 하다 신학문으로 기울었다. 남강 이승훈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시당 여준과 단재 신채호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류영모의 나이 20살이었다. 그 두 사람이 류영모에게 동양학을 공부하기를 충언했다. 그래서 《노자》와 불경을 비롯하여 동양학을 본격적으로 두루 섭렵하게 되었던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서울 종로 YMCA 연경반을 35년(1928∼1963년) 동안 지도하면서 성경만이 아니라 동양 고전을 두루 강의하였다. 꺼져 가는 동양 고전에 대한 면학 정신의 불씨를 살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뒤 1967∼1968년에 류영모가 빛골(光州) 무등산에 자리 잡은 김정호(목포대 교수)의 산양목장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류영모가 《중용》을 우리말로 다 옮겼다. 그 복사본이 필자에게 전달된 것은 1992년이었다. 여러 동양 고전을 발췌해서 우리말로 옮겨 강의 자료로 썼으나 우리말로 완역한 것은 《중용》과 《노자》뿐이다. 그밖에 문장이 짧은 불경인 《반야심경》, 장횡거의 《서명(西銘)》 같은 것은 여럿 있다. 류영모가 《논어》, 《맹자》, 《주역》, 《서경》 등 다른 유교 경전도 좋아하면서 굳이 《중용》만 우리말로 완역한 까닭이 무엇인가? 유교 경전에는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인데, 《중용》만은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풍성하기 때문이었다. 《중용》에는 노장(老莊)이나 불경(佛經)에 못지않은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공통되고 일치된 사상이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람은 본디 몸으로는 온전한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 성질(본능)로 살고 있다. 그 수성(獸性)으로 인하여 못 참게 먹고 싶고(貪) 못 참게 성나고(瞋) 못 참게 얼르고 싶다(痴). 문명의 발달로 살림살이는 좀 넉넉해지고 편리해졌지만 도둑질(탐), 싸움질(진), 음란질(치)이 여전한 까닭은 사람이 짐승이기 때문이다. 이 짐승의 ‘나’는 참나가 아니므로 짐승의 ‘나’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하느님으로부터 얼생명(靈性)을 받아 수성(獸性)에서 자유(해탈)로운 사람(하느님 아들) 노릇을 하자는 것이다. (‘머리말’에서)

 

 

 

 

번역.강의 앎과 삶이 하나였던 참사람 다석 류영모(1890~1981)

다석 류영모는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처음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老子)》를 한글로 완역하는 등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 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

생전에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재단법인 씨알’을 만들었다.

 

 

풀이 박영호(1934~)

1934년에 태어난 박영호는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가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그는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박영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다석 마지막 강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잃어버린 예수 -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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