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_ 아리안 샤비시
Arguing for a Better World _ Arianne Shahvisi
“침묵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에겐 더 강력한 논리가 필요하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기만의 언어를 뚫고 나가는
과감하고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사유!
분열의 언어와 가짜 논리가 미디어와 SNS를 뒤덮었다. 보수 정치인들이 내뱉는 ‘자유’ ‘공정’ ‘불법과 합법’ 같은 말들은 겉보기엔 흠잡을 데 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은밀한 ‘이중 언어’임이 드러난다. 전 세계를 휩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맞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고 외치는 것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인종차별의 현실을 은폐하는 가짜 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기후 위기 시대에 대중화된 ‘탄소 발자국’은 어떤가? 수많은 양심적 소비자들을 죄의식에 빠뜨린 이 말은 글로벌 석유 회사가 자본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려고 만들어낸 기만적인 표어였다! 여성들을 무참히 죽이는 남성 폭력을 고발하는 ‘남자는 쓰레기다’ 해시태그 운동에 남성혐오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남자는 다 쓰레기라고? 그러나 ‘남자는 쓰레기다’라는 총칭적 일반화는 남성 폭력 문화를 겨냥하는 정당한 언어임이 이 책을 통해 논리적으로 선명하게 밝혀진다.
기득권 세력은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고 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저항 세력을 무력화하려 한다. 이 책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문화 전쟁’의 최전선에서 철학적 분석과 논리적 반박이 어떻게 진실을 꿰뚫어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차갑고도 뜨거운 목소리다. 저자 아리안 샤비시는 ‘비판적 탐구’라는 철학의 정신에 입각해 성차별, 인종차별, 정치적 올바름(PC), 도그휘슬(dog whistle), 구조적 불평등을 비롯한 오늘날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는 정치적 주제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그 핵심을 파고들어 전복적으로 해석한다. 이 책은 공론의 장을 점점 더 위협하는 언어 양극화의 현실에 맞서 저항의 언어를 벼리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감하고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논리적 사유의 현장이다.
나는 언어와 개념에 집중한다. 언어는 우리가 관찰한 것을 이해하고 여러 범주로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우리를 둘러싼) 물질적 현실은 이러한 언어 사용에서 생겨난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의 전략적 사용은 대중 감시, 감금, 살인에 도덕적 명분을 제공했다. ‘불법’이라는 단어가 타인의 시신이 떠밀려 오는 바로 그 해변을 유유자적 즐기게 한다. ‘범죄자’라는 꼬리표에는 어떤 이들의 삶이 격렬하게 부정당하는 동안 우리는 자유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젠더와 인종 범주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착취에 의존하는 경제를 가능하게 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단어와 개념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_ ‘들어가는 글’에서
‘문화 전쟁’ 최전선에서 벼리는 저항의 언어
저항의 언어는 언제나 위태롭다. 억압과 분열의 언어에 맞서 싸우는 말들은 그 본의가 쉽게 왜곡·과장되거나 흔히 말꼬리 잡기식 공세에 시달린다. 논점은 이탈되고 흠집 잡기가 시작된다. “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이러다간 아무 말도 못 하겠네!” 차별이나 혐오가 직접 언급되기보다는 그들끼리의 언어로 암호화되어 은밀히 퍼지기도 한다. 이러한 속임수 탓에 문제를 지적하기조차 쉽지 않을뿐더러 지적하더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오히려 예민한 사람, 농담에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 취급받기 일쑤다. “지나치게 의미 부여하는 거야.” “피해망상이야.” 우리의 해방의 언어가 세상을 바꾸기도 전에 무너지고 주저앉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싸워야 할까?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는 우리 일상을 에워싸고 있는 ‘문화 전쟁’에 대한 철학적 해부이자 차별과 혐오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논리적 안내서다. 아리안 샤비시는 철학 교수로서 숱한 토론 수업을 진행하며 학생들에게 받았던 질문들과 사회적·정치적 현안과 관련해 언론 매체에 꾸준히 글을 쓰며 받았던 피드백들을 포함해, 깊이 있는 철학적 지식과 일상에서 건져 올린 풍요로운 사례들을 이 한 권의 책에 모두 녹여 냈다. 샤비시는 역차별 논란,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 표현의 자유 제한, 기후 위기의 책임 문제 등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이슈들 속으로 들어가, 냉철하게 분석함으로써 논쟁의 장 자체를 뒤흔들고 전복한다. 어떤 문제가 의제화되고 어떤 사실이 은폐되는가. 어떤 개념과 논리가 시선을 끌고 논란을 야기하는가. 샤비시는 논쟁의 배후를 날카롭게 해부함으로써 권력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교차성, 총칭적 일반화, 인식적 불의를 비롯한 철학의 도구를 사용해 명료하게 밝혀낸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이 책은 비판적 탐구라는 철학의 정신에 확고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 …… 변화를 만들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대단히 매력적이고도 실용적인 책. _ Publishers Weekly
이 책은 불의한 현실에 공모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에게 도전하는 목소리다. 저자 아리안 샤비시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우리가 서로와 그리고 우리 자신과 나누기 힘든 논의들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관용적인 길을 제시한다. _ SALON
분열적인 정치적 질문들에 맞선 철학 교수의 냉철한 접근이 돋보이는 책. _ Kirkus Reviews
이 책은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는 공론의 장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_ 캐럴 해이, 《페미니즘 사용법》 저자
도무지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억압이 우리 일상에서 어떻게 생겨나고 작동하고 지속되는지, 우리가 어떻게 억압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한다. _ 대니 돌링, 《불의란 무엇인가》 저자
‘남자는 쓰레기다’라고 말하면 성차별인가?
2017년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군 ‘남자는 쓰레기다’ 해시태그 운동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남성의 강간·폭력 문화를 폭로했다. 그러나 곧바로 문제 없는 ‘평범한’ 남자들까지 싸잡아 욕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고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라는 반발에 직면했다. 논의의 중심을 문제 있는 남성에서 문제 없는 남성으로 교묘하게 옮기는 전형적인 논점 이탈이자 주의 흐리기 전략이었다. ‘남자는 쓰레기다’가 ‘혐오 표현’이라면 ‘어떤 남자는 쓰레기다’라고 고쳐 말해야 하는 걸까? ‘남자는 쓰레기다’라는 말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
‘남자는 쓰레기다’는 남성성에 피해 입는 사람들의 인내심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며, 단순한 발화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요구로 보아야 한다. …… 이것을 혐오 표현이라고 주장하거나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은 핵심을 놓쳤다. 누군가가 ‘남자는 쓰레기다’라고 했다면 그는 성적 괴롭힘과 남성성을 연결 지은 것이다. 이것은 혐오 행위가 아니라 규명 행위다. _ 110쪽
‘남자는 쓰레기다’는 총칭적 일반화다. 이 진술은 모든 남자가 쓰레기라는 뜻이 아니라 쓰레기스러운 특성과 남성이라는 특성 사이에 우리가 주목하고 깊이 생각해볼 만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 상관관계의 증거는 넘쳐나고, 이는 남자들을 조심해야 할 이유가 된다. 또한 이 문구는 일종의 도발이자 도덕적 비난과 저항의 진술로서 기능한다. _ 119쪽
암호화된 혐오 ‘도그휘슬’, 감춰진 혐오 ‘무화과잎’
‘도그휘슬’과 ‘무화과잎’은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이들이 취하는 간접적인 말하기 방식인데, 타인의 정치적 견해를 은밀히 조종하는 힘을 갖고 있다. ‘도그휘슬’은 언뜻 평범한 말처럼 들리지만 특정한 사람들만 알아듣게끔 정치적 메시지를 암호화하는 것을 뜻한다. 보수 정치인들이 ‘자유’를 거듭 강조함으로써 사회주의적 가치를 표방하는 세력을 배제한다는 신호를 보내거나 ‘불법 시위’라는 말로 집회의 당사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식이다. 한편 ‘무화과잎’은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는 이슬람 친구가 많지만…” 하고 덧붙이는 말인데, 자기 발언에 담긴 공격성을 은폐하거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교묘한 술수다. 이들은 혐오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뻔뻔하게도 혐오주의자라는 혐의는 피하려 한다.
표현의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을 한 사람이 ‘진짜로’ 의도한 바를 밝히기는 어렵다. 이게 도그휘슬이다.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있지만, 맥락을 충분히 알기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표면적 의미와 진짜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도그휘슬에는 ‘그럴듯한 부인’이 확실하게 장착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인종차별적 저의를 알아차린다 해도 그런 뜻이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다.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 그런 거다”, “남의 말을 곡해했다”, “피해망상 아니냐”라고 받아치면 그만이다. _ 75쪽
무화과잎이 그토록 잘 통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억압에 대해서 생각할 때, 표현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결과보다 표현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을 극소수 악인들의 전유물로 본다면,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든가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면, 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는 건 지나쳐 보인다. _ 84쪽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말은 왜 문제적인가?
2020년 백인 경찰의 과격한 진압으로 인해 비무장한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남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거세게 일었고, 그 영향은 전 세계로 퍼져 반(反)흑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잇따랐다. 반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점차 힘을 얻자, 이 구호에 반대하는 이들이 나타나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인종차별은 극복되었고 우리가 ‘탈인종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피부색을 따지는 것이 오히려 분열을 자초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구호는 사실상 다른 생명, 특히 백인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왜 백인들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말 속에서 백인에 대한 배척을 읽어내는 것일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가 담고 있는 함의는 무엇일까?
요컨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지 않다. 한 번 쓰면 그만이고 무시해도 괜찮은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 흑인의 고통과 죽음은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이것이 수감자, 경찰 총격 피살자, 굶주림이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병 때문에 단명하는 사람 가운데 흑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다. 흑인은 자유, 생필품에 대한 접근성, 공정한 대우를 부정당할 가능성이 세계 어느 집단보다도 높다. _ 133쪽
만약 현재 논의되는 중대한 질문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한가?’라고 가정한다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매우 합리적인 대답이고 다른 생명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 하지만 논의되는 질문이 ‘어떤 생명이 소중한가?’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가 더 합리적인 대답이기 때문에 거리에 울려 퍼지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가 혼란스럽고 불편할 수 있다.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인종적 정의를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구호의 발화가 현재 작동 중인 시스템을 공연히 교란하거나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본다. _ 149~150쪽
‘정치적 올바름’은 좌파의 독단주의인가?
‘정치적 올바름’은 흑인,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과 차별 행동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정치적 행동을 가리킨다. 대표적으로 영어에서 흑인을 비하하는 ‘검둥이’라는 뜻의 인종차별적 비방인 ‘니그로(Negro)’, ‘니거(Nigger)’라는 단어를 피하기 위해 ‘N단어’로 지칭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의 ‘과도한’ PC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문화 전반을 경색시키는 ‘독단주의’라고 비판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군중의 광기”(더글러스 머리), “좌파의 집단주의”(조던 피터슨)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표현이 자유로워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혐오 표현을 막는 금기어를 늘린다고 해서 문화 전체가 경색되고 전체주의로 흐를 것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지나친 비약이자 논리적 오류(미끄러운 비탈길 오류)에 해당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우파의 도구로 포섭되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주목받는 이력을 쌓아 왔다. 정치인들과 보수 칼럼니스트들은 주변화된 집단들의 요구나 선호를 고려해야 한다는 신호가 보이면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을 규탄하는 것으로 반응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정치적 올바름은 모든 형태의 재미를 망치는 것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항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코미디, ‘악의 없는 농담’, 코스튬 파티, ‘영국적 가치’, 섹스의 즐거움에 언제 찬물을 끼얹을지 모르는 유령 취급을 한 것이다. _ 234~235쪽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반흑인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N단어를 삼가세요”라는 말과 “이러다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살겠네”라는 주장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종류의 비약은 수시로 일어난다. 여성들이 성적 괴롭힘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듣고서 이런 세상에서 섹스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다고 상상해보라. …… 더글러스 머리의 “이제 섹스도 못 하겠네”라는 급발진은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새롭고 달갑지 않은 발상 앞에서 금세 과장하고 비약하는 방식의 전형적 예다. _ 250~251쪽
불신당하는 여성의 말
여성과 유색인종의 말은 왜 자꾸 의심받는 걸까? 신뢰에는 인종과 젠더에 따른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정 집단은 지나치게 신뢰받고(신뢰 과잉) 다른 집단은 툭하면 의심받는다(신뢰 결여). 신뢰받는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존중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키우지만, 반대로 불신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신뢰를 배분하는 방식을 근본부터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 특정 집단만 무비판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이미 그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신뢰를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신뢰할 만하다고 인지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뢰할 만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들은 취업을 하고, 직장에서 존경받고, 논쟁에서 이기고, 소셜미디어에서 팔로어를 얻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고, 경찰과 법원에서 진지하게 존중받고, 정치나 언론 같은 공적 영역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_ 166쪽
학대당한 여자가 느끼는 공포보다 누명을 쓴 남자가 느끼는 공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그래서 걸핏하면 여자 쪽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부터 하고 본다. 인생의 다른 어떤 경험도, 다른 어떤 범죄도, 이처럼 요란하고 자동적인 의심과 이처럼 억지스러운 공감부터 만나지는 않는다.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경고 사례가 되어버리기에 우리는 침묵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_ 184~185쪽
‘탄소 발자국’이라는 사기극
개인이 직‧간접적으로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 총량을 가리키는 ‘탄소 발자국’ 개념은 기후 위기 시대에 환경적 정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 수치에 따라 자가운전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지향하며 찬물로 세탁하는 일에 사람들이 점점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탄소 발자국’ 개념은 구조의 결함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기 위해 글로벌 석유 회사가 의도적으로 대중화시킨 것이다. 공정 무역 커피, 친환경 세제, 자선 단체 기부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죄의식을 자극해 사회적 시스템의 결함을 가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장을 창조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마케팅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끼치는 기여가 미미하고 지배적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기후나 빈곤 문제에서 개인의 책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평등한 구조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느 한 국가 혹은 산업의 생태 발자국 개념은 1990년대부터 있었지만 개인의 ‘탄소 발자국’은 2000년에 갑자기 떠올랐다. 그 이유는 영국의 석유 기업 ‘브리티시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이 광고홍보기업 ‘오길비&매더(Ogilvey&Mather)’에 의뢰하여 기후 변화의 책임이 화석 연료 회사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는 식으로 공론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2004년에 BP 홈페이지에는 사용자 친화적인 탄소 발자국 계산기를 자랑스럽게 내놓았고, 결과적으로 1일 원유 생산량이 370만 배럴인 대기업의 홈페이지에서 보통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측정해보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_ 326쪽
책임을 개인화할 때 함정을 염두에 두되 극단적인 그 반대의 경우도 경계하여 구조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우리 자신을 너무 가벼이 봐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 구조적 문제를 너무 자주 들먹인다는 것은 종종 추상적이고 무정형적이며 극복할 수 없는 힘을 지목한다는 의미다. …… 우리는 구조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과장 없이 인정하는 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행동에 그리 영향받지 않지만 그 행동들의 총합으로써 영속화된다. 그와 동시에 각 개인은 오직 자신의 행동만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_ 329쪽
아리안 샤비시(Arianne Shahvisi)
철학 교수. 쿠르드계 영국인으로 케임브리지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과 천체물리학을 공부했다. 현재 브라이턴&서식스 의과대학(BSMS)에서 응용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윤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젠더, 인종, 이민 문제에 관한 여러 편의 철학 논문을 썼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으며, 〈가디언〉, 〈인디펜던트〉, 〈프로스펙트〉, 〈이코노미스트〉에도 기고하고 있다.
샤비시는 자신의 첫 책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Arguing for a Better World)》에서 이슬람 가정에서 자란 비백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교차적인 정체성을 인식의 도구로 삼아 뜨거운 정치적 이슈에 뛰어들어 도전적인 사유로 잘못된 논쟁의 구도에 균열을 낸다. 이 책은 날카로운 논리적 분석의 메스로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적 쟁점을 해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세진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외로움의 철학》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나르시시즘의 심리학》 《내 안의 어린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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